읽고본느낌

용서의 능력

샌. 2006. 4. 11. 14:42

최근에 읽었던 ‘용서’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흑백 인종 갈등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 해방 운동 단체에 의해 수류탄 공격을 당한 한 백인 여성이 있었다. 지금도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무차별적인 공격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 공격으로 그녀의 많은 친구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녀 역시 장기간 중환자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생명은 구하고 퇴원했지만 다른 사람이 그녀를 목욕시켜 주고, 옷을 입혀 주고, 음식을 먹여주어야 했다. 그녀의 몸속에는 아직도 많은 수류탄 파편이 박혀 있다.

과거사 진실 규명 위원회에 출석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사건은 내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었어요.”

“가해자를 만나고 싶군요.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를 만나고 싶어요. 그를 용서해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 또한 나를 용서해 주기를 바래요.”


작은 상처 하나에도 세상을 저주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인생이 억울하게 망가지고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다른 사람을 배려해 주는 사람도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용서해 준다는 말은 가끔 듣지만, 도리어 피해자로부터 용서를 받고 싶다는 이 백인 여성의 이야기는 우리를 감동시키고 인간성에 대한 깊은 신뢰를 준다.

그녀는 아마 자신을 불구로 만든 그 사건의 배후에 있는 흑백 갈등과 인종 차별이 결코 어느 집단만의 책임이 아님을,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원한과 복수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모른다. 가해자로부터 용서를 구하는 마음은 모든 존재가 한 몸이라는 아름다운 깨달음이 없다면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다.


인간이 타인을 얼마나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느냐에 대하여 회의가 들 때도 많다. 겉으로는 화해를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계속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입으로는 용서를 말하지만 속으로는 그를 축복하지 못한다. 마음속에서 돋는 미움의 싹이 마치 오뉴월 밭에서 나는 풀들과 같다. 진심으로 용서하기는 인간의 몫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위에 나오는 백인 여성의 이야기는 인간 속에 신의 숨결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시켜준다.


그런 면에서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가르치는 종교의 역할이 갈등과 반목의 이 시대에 더욱 커지고 있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실천하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 개인의 구원이나 기복에서 벗어나 사회의 갈등을 해소해주고 평화를 이룩하는 종교의 역할이 기대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는 대규모 살육전의 배후에 민족의 차이, 종교의 차이가 도사리고 있다. 그런 차이점을 감싸 안으며 서로 용서하고 화해시켜야 할 종교가 도리어 원한을 부추겨서 자기 세력을 확장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왜 용서를 해야 되는가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를 함으로써 우리는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용서를 하는 것과 받는 것은 둘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천주교 주기도문에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신에게 용서를 받는다는 행위는 먼저 이웃을 용서해주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물론 이 기도문을 올릴 때마다 늘 가슴에 찔리지만 말이다.


작은 일도 침소봉대해서 남의 탓으로 돌리고 원망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을 파멸시킨 상대일지라도 껴안고 세상과 화해하며 마음의 평화를 해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일보다는 남을 먼저 걱정한다.

이런 차이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용서하는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의 차이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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