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층 아파트 문제>
요즘 도심의 초고층 유리건물은 오피스 빌딩이 아닌 아파트로 넘어간 지 꽤 오래되었다. 공실률(空室率)이 늘어나면서 오피스 빌딩 공사는 침체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기업 활동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반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돈이 200조니 300조니 하다 보니 이들의 주머니를 노린 새로운 건물 유형이 등장하게 되었다.
초고층 아파트이다. 형식은 오피스텔이다 주상복합이다 해서 구실을 갖추었지만 실상은 아파트 투기를 대규모화해서 판돈을 키운 것뿐이다. 오피스텔처럼 오피스 기능을 함께 집어넣든지 주상복합처럼 저층부를 상업시설로 하면 주거전용 제한을 안 받기 때문에 아파트 건물을 높이, 심지어 60층까지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을 안 고치고도, 뇌물을 먹이지 않고서도 합법적으로 60층짜리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안전한 투기판을 확보한 셈이다.
평당 분양가가 2,000만원을 훌쩍 넘는 이런 초고층 변종 아파트에서 순수한 주거 수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다.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대부분 투기 수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핵심으로 작용한다. 돈 가진 사람들에게 고급 이미지를 선사함으로써 선별의식의 허영심을 한껏 고취시켜 줄 것과 투기성과를 확실하게 보장해 줄 것이 그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투기와 허영심이라는 잘못된 목적을 위해 낸다고 낸 꾀가 가관이다. 분양가를 평당 2,000만원은 받아야 하다 보니 실내에는 쓰지도 않는 별의별 장치들이 다 들어가고 원목이다 수입 대리석이다 해서 비싼 사치재로 치장한다. 부엌 싱크대 세트만 1억이네 2억이네 하는 판이다. 우리한테는 전혀 안 맞는, 서양의 상류층이 요리사를 거느리며 사용하는 데 필요한 기능들까지 갖추고 있다. 아파트 제목이 ‘○○ 캐슬’이니 사실 이런 시설이 빠지면 웃기긴 웃길 것이다.
이런 코미디 같은 풍경보다 더 심각한 진짜 문제가 있다. 오피스 빌딩을 흉내 내 전면 유리로 짓다 보니 창이 안 열리게 된 것이다. 열리는 창은 한 구석에 손바닥만큼, 그것도 큰맘 먹고 마지못해 동냥 주듯 만들어져있다. 크기만 작은 것이 아니다. 열리는 각도가 옆으로 여는 창은 90도, 들어 올리는 창은 45도만 돼도 선심 쓴 것이고 보통은 그보다 훨씬 못하다.
사람 사는 집에서 창이 안 열린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하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건축하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창을 열리도록 디자인하면 프레임이 두 겹이 되기 때문에 디테일이 지저분해진다고 믿는 건축가들이 많이 있다. 이 때문에 이음새 없는 깨끗한 외관을 위해 오피스 빌딩은 보통 창이 안 열린다. 실내 열환경 문제는 기계식 강제 공기조화로 해결한다. 이런 방식은 오피스 빌딩에서조차도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것이 사람 사는 집까지 지배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정말로 심각하다. 자연환기로 충분히 버틸 수 있는 4, 5월부터 냉방을 틀기 시작해서 10월, 심지어 11월까지 틀어야 된다. 이 때문에 햇빛 잘 드는 남향은 오히려 기피대상이 되기도 한다. 5월과 10월의 햇빛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기 시작한다면 그 사람의 자연관은 이미 심하게 일그러진 것이다. 그 속에 사는 사람의 기와 혈이 제대로 돌 리가 없다. 호흡기와 순환기 계통의 잔병을 달고 산다. 이를 고치기 위해 병원에 가서 간에 나쁜 독한 주사를 맞고 약을 먹는다. 인공성이 두 겹 세 겹으로 생활을 지배하면서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든다.
건강상의 문제만이 아니다. 생활 전반까지 나빠진다. 청국장이라도 끓여먹거나 고등어라도 구워먹는 날이면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냄새 빠지는 데 1주일 이상 걸린다. 귀찮으니까 점점 인스턴트 가공식품에 의존하게 된다. 이걸 사람 먹는 거라고 먹고 사니 몸 컨디션이 정상일 리가 없다. 가진 게 돈뿐이라고 이상한 보약이나 찾게 된다. 방송에서 운동하라고 난리니 운동이라도 해볼까 나서보지만 기껏 가는 곳은 같은 건물 내 3층에 있는 헬스클럽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런 종류의 초고층 아파트의 주변 환경을 보면 달리 운동할 곳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헬스클럽이라고 하지만 자기 집하고 같은 건물에 들어있으니 이곳도 창이 안 열리기는 마찬가지, 결국 인공성의 폐해가 쳐놓은 거대한 성에서 못 빠져 나오고 헐떡거리며 살과 뼈를 갉히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초고층 아파트에 많이 붙는 ‘캐슬’이라는 이름이 이런 식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자폐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집들일수록 자기 콤플렉스가 심해서 광고에는 꼭 자연을 끌어들인다. 창을 안 열리게 해놓고 자연이 허락했느니 자연이 지었느니 떠든다. 아니다, 절대 그럴 리 없다. 자연이 이런 걸 허락했을 리 없다. 자연이 이렇게 지었을 리 없다. 이게 요즘 평당 2,000만원을 넘어서며 가장 좋다는 집의 현실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이곳을 탈출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여기 사는 사람들은 절대 그러지 못한다. 그럴 수 있는 사람 같았으면 처음부터 들어가지도 않았다. 못 들어가서 난리인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에 산다는 허영심은 너무도 견고하고 완강한 것이어서 마치 노예를 묶어두는 쇠공처럼 이들의 발목을, 아니 마음을 꽉 잡고 놓지를 않는다.
무릇 집이란 바깥 공기와 숨을 통해야 건강성을 유지하게 되어있다. 추위, 더위, 비바람 등 자연환경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집의 기능이지만 이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목적은 쾌적한 환경이다. 자연환경으로부터의 보호는 쾌적한 환경을 돕는 선까지만 유효하다. 그 이상을 넘어서면 그것은 독이요, 더 심해지면 악이 된다. 외기를 차단한 채 냉난방이 지나쳐 쾌적한 환경을 해친다면 이것은 집의 기본 의미에서 벗어나는 짓이다.
또한 무릇 집이란 그 속에 사는 가정의 가풍과 분위기와 품격을 보여주는 얼굴이다. 내심의 발로가 얼굴의 인상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 선조들은 집이 갖는 이런 인상 기능에 정심(情深)이니 기성(氣盛)이니 하는 정신적, 심리적, 심미적 가치를 부여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이 집도 달라야 한다. 집은 주관화가 큰 건물 유형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반대로 가고 있다. 아파트는 객관화가 높은 건물 유형이기 때문에 집의 주관화를 지운다.
그것도 모자라 객관화가 가장 심한 오피스를 닮아가고 있다. 멀리서 보면 번들거리는 멋진 유리집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자. 열리지도 않는 유리 속에 생활용품과 가재도구들이 가득 쌓여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어항 속에 갇혀 헐떡이는 붕어가 떠오른다. 이렇게 힘들게 스스로를 옭아매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돈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파트로 뻥 한 번 잘 치면 건설회사, 관련 공무원, 재개발 조합, 주민, 그리고 조폭까지 배터지게 챙길 수 있다.
일반론적으로 초고층 아파트는 후기 자본주의의 건축적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서양의 경우 그 곳에는 사회, 경제, 문화적 코드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우리는 이 가운데 ‘투기’라는 한 가지 목적에 집착하는 편집증에 해당된다. 우리의 초고층 아파트는 건전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변비에 걸린 후기 자본주의시대의 부를 뚫기 위한 단기처방의 배설작용이다. 근본을 못 고친 단기처방은 항상 더 자극적 처방을 요구하게 되어있다. 돈이라고 무한정 있지는 않을 터, 초고층 아파트로 다 빼먹고 나면 그 다음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정말로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날로 광폭해져가는 아파트>
1998년 경 국내의 대형 건설 회사들은 새로운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에 대비해 자사만의 아파트 모델을 개발하는 작업이었다. 평당 분양가가 200만~300만 원하던 때였다. 그러나 이미 건설 회사들은 10년 이내에 분양가가 1,000만원 안팎까지 올라갈 것을 가정하고 이에 맞는 새 아파트 모델을 개발하고 있었다.
개발의 방향은 무척 황당했다. 한 마디로 평당 분양가 1,000만 원짜리 아파트에 맞는 ‘이미지’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3배에서 5배까지 오르는 가격에 합당한 질적 향상에 대한 고민은 빈약했다. 실내의 질적 변화에 대한 대비는 외국산 고급 마감재를 쓰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 가격을 그럴싸하게 포장해낼 포장지를 개발하는 일에 모든 능력이 집중되었다. 심하게 얘기하자면 물건 값을 더 올려도 뻔뻔하단 소리 안 듣게 해줄 브랜드 만들기 작업이었다. 큰 방향은 가능한 한 고급스럽게 보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때 아이디어라고 나온 단어들이 ‘유럽, 고성(古城), 궁전, 미래, 첨단, 여성, 질투, 경쟁, 환경, 그린, 생태, 자연’ 등이었다. 지금 아파트 광고를 도배하고 있는 단어들이다. 아주 잠깐, 아파트에 한옥 창을 넣고 대청마루를 만드는 등 한국식 모델이 등장한 적이 있었지만 6개월을 못 버티고 기억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파트 값을 비싸게 붙일 명분으로는 너무 약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파트가 한옥이 된다는 논리도 황당했지만 그런 모델로는 값을 올릴 수 없다는 논리는 더 황당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었다.
그 자리를 ‘유럽, 첨단, 그린’으로 대표되는 다른 모델이 차지했다. 이로써 우리 주변을 지배하고 있는 새로운 아파트 유형의 기본 논리가 완성되었다. 그 논리는 참으로 간단하다. “우리 아파트는 유럽풍의 고급 아파트이며 자연적이고 친환경적인 그린 아파트라고 우겨라. 유럽의 고성이나 궁전이 가장 좋은 모델이다. 아닌 건 알지만 생떼를 써라. 아니면 매우 첨단적이고 미래적인 것처럼 보이게 해라. 그러면서 실내 마감재를 비싼 외제로 써서 최대한 값을 올려라, 그리고 반드시 여자의 경쟁 심리를 건드려라”였다. 지금 아파트는 꼭 이대로 가고 있다. 아니 이미 너무 많이 가 버렸다.
동호대교 위에 서서 한 바퀴만 돌아보자. 먼저 남쪽을 보자. 그 유명한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가 황토색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1975년에 지어진 15층짜리이다. 동부이촌동에 이보다 먼저 15층짜리 아파트들이 지어졌지만 대단위 단지로는 압구정동이 처음이었다. 고층 아파트의 시작이었다. 사람 사는 집이 15층이라니, 당시만 해도 입이 딱 벌어지는 높기만 하던 층수였다. 이후 약 15년 정도 이 층수가 지배했다. 5층짜리를 재개발해도 15층만 올리면 너도나도 골고루 배터지게 뽑아낼 수 있는 층수였다.
몸을 뒤로 돌려 옥수동 일대를 보자. 25층짜리 아파트들이 작은 동산 높이만큼 올라가 있다. 90년을 넘어오면서 사람들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5층 가지고는 성이 안 찬다는 것이었다. 병풍처럼 넓적하던 15층짜리가 창처럼 뾰쪽한 25층으로 높아졌다. 수평비례가 수직비례로 바뀌면서 조형 환경의 개념이 달라졌다. 초고층 아파트의 시작이었다.
90년대 후반으로 오면서 이것도 다시 부족해졌다. 건설회사들은 10억원 이상 가진 사람들이 몇 만이네 몇 십만이네 하는 통계를 철석같이 믿었다. 투기와 투자가 구별이 안 되는 사회이니 비싼 상품만 내놓으면 이 사람들이 한 채씩 살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들은 성공했다. 분양가 자율화가 이루어졌다. 10년, 20년 어렵게 모아서 분양받던 이전하고는 완전히 다른 투기 패턴이 형성되었다. 암만 봐도 투기지만 건설회사들은 경제논리에 기초한 건강한 투자라고 했다.
소득이 선진국에 접어들면 주택시장에는 공공성이 강해지는 것이 통례이지만 우리는 그 반대였다. 유감스럽게도 건설회사들의 바람과 예측은 정확했다. 40층짜리 철골 아파트가 등장하면서 대히트했다. 분양가도 층수도 모두 고삐가 풀리면서 천정부지로 솟았다. 일부는 50층을 뚫고 60층까지 올라갔다. 강남에서 먼저 시작된 40층짜리 모델은 곧 강북으로 번졌다. 아직 25층짜리 집의 황당함에 익숙해지기도 전이건만, 다시 그 위로 삐쭉삐쭉 고개를 내밀고 높이를 자랑하는 더 센 놈이 최강자로 군림했다. 25층이 초고층이니 달리 붙일 말도 없었지만 건설회사들은 초고층이라고 했다.
서울 등 대도시의 현대사는 아파트를 기준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런 관찰은 동호대교 위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어디든 곳곳에서 가능하다. 시내버스를 타고 서울을 돌아다녀보자. 걸어서라도 좋다. 눈높이에서 시선은 완전 차단된다. 45도로 들어도 어림없다. 완전 포위다.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면 더 심각하다.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지배하는 것은 더 이상 오피스 빌딩이 아니다. 40층짜리 아파트들이다. 뜬금 없이 여기 삐쭉 저기 삐쭉 고개를 쳐들며 희죽거리고 있다.
이런 아파트들에는 천편일률 같은 공통점이 있다. 자극적이고 현란한 광고가 따라붙는 것이다. 중독이 심해져 점점 강한 약물을 넣어야 자극이 느껴지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더 강렬한 광고 문구를 동원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친다. 이제는 그 놈이 그 놈처럼 같아져서 변별력도 사라지고 있다. 참으로 희한한 광고 문구들이 귀에 남아서 윙윙거리긴 하지만 정작 그것이 어느 아파트, 어느 건설회사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막연한 집단 논리만이 횡행하는 형국이다. 폭력조직 ‘범서방파’와 ‘호남파’를 꼼꼼히 따져 구별하는 사람이 없듯, 그저 무엇인가 크고 강력하고 무서운 집단들이 코미디처럼 겨루고 있다는 사실만이 감지될 뿐이다.
광고 문구들을 보자. ‘저 성에 사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다, 이 성에서 햇볕 사용법을 배웠다,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건강한 사치를 누리자’ 등등이다. 자기네 40층 아파트가 들어오면 온 도시가 푸른 녹지로 변한다는 회사도 있다. 배용준이 나와서 내 여자한테는 이런 아파트를 주고 싶다는 회사도 있다. 자기네 아파트에 살면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게 된다는 회사도 있다. 아파트 이름에 ‘올 래’(來) 자 하나 넣고 여자의 미래가 바뀐다는 회사도 있다. 아파트가 아니라 환경을 짓는다는 회사도 있다.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가 지은 성당 이름과 똑같이 지어놓고 자기네 아파트가 가우디의 명품과 같다는 회사도 있다.
이외에도 많다. 나는 우울할 때면 아파트 광고를 본다. 정말로 웃기는 문구들로 넘쳐난다. 새 광고가 나올 때마다 개콘이나 웃찾사 프로가 시작할 때보다 더 기다려지고 흥분된다. 이번에는 또 어떤 기상천외한 생떼가 등장할까 기대되기만 한다. 하지만 이건 정말로 서글프고 분노해야 할 삐뚤어진 현실이다. 좋게 말하면 코미디요, 나쁘게 말하면 사기다.
요즘 개인주택 짓는 일은 자살행위에 비유된다. 땅값 1억에 공사비 2억 해서 3억원 들여 집을 지었다고 치자. 그 순간 집에 들어간 공사비 2억원은 날아가 버린다. 5년 살다 이사를 가게 되거나 목돈 쓸 일이 생겼다든가 해서 그 집을 판다고 해보자. 집값은 한 푼도 못 건진다. 땅값이나 올랐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고스란히 다 날리게 돼있다. 그러나 아파트는 그렇지 않다. 묵히면 묵힐수록 골동품처럼 신기하게 돈이 눈덩이처럼 와서 붙는 게 아파트이다. 이 얼마나 신기한 도깨비 방망이인가.
주택산업은 아파트로 완전히 획일화했다. 주택산업 뿐 아니다. 건설산업 전체가 그런 판이다. 건설회사 이윤에서 아파트 개발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져 간다. 이를 위해 아파트는 실내구성, 규모, 공법, 분양가 등 모든 면에서 같아져 간다. 중소도시와 시골 논밭 한복판에도 대형 크레인밖에 안 보인다. 경제논리가 표면에 나서지만 진짜 논리는 투기일 뿐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 끝이 과연 어디냐는 것이다. 40층짜리로도 성이 안 차게 됐다. 다음은 100층짜리 아파트를 지을 것인가.
- 이화여대 건축학과 임석재 교수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걱정을 먹고 사는 인간 (0) | 2006.03.15 |
---|---|
운동의 즐거움 (0) | 2006.03.09 |
첫째의 첫 출근 (2) | 2006.02.01 |
한 장의 사진(4) (0) | 2006.01.30 |
자성(自省) (0) | 2006.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