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목돈 / 장석남

샌. 2012. 6. 2. 09:01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 같은 이 300만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 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겁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쓰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 목돈 / 장석남

 

몇 년 전에 비상금이란 걸 마련해 본 적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마누라 모르는 돈이 필요하다는 충고가 솔깃했기 때문이다.나한테 눈먼 돈이 찾아올 일은 없고, 어렵사리 모았댔자 잘 나가는 사람들 하룻밤 술값도 안 되는 액수였다. 마누라 눈치 안 보고 요긴하게 내 마음대로 쓰리라, 하면서 아직까지 그 돈은 혼자만 아는 곳에 숨어 있다. 없을 때는 필요할 것 같더니, 있으니 정작 쓸 데가 없다. 그렇다고 친구를 불러내 거하게 한턱 쏠 호기도 없다. 지금은 이리저리 신경만 쓰이고 차라리 없는 게 낫겠다, 싶기도 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푼돈에 불과한 게 어떤 사람에게는 안절부절못하는 목돈이 된다. 갑자기 생긴 300만 원에 쩔쩔매는 시인의 모습이 재미있다. 아마 나도 마찬가지겠지. 돈도 쓸 줄 아는 사람이 쓴다고 했던가, 살아온 게 이 모양이니 멋지게(?) 쓸 줄도 모른다. 쩨쩨한, 그러나 사랑스러운 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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