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터와의 만남은 마을 안에 있는 S 수녀원에 피정을 온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의 일들이 우연이기보다는 필연적인 무엇이 있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증명을 할 수는 없다. 그런 심정적인 느낌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운명론적으로 기울게 되는 탓인지도 모른다.
침묵 피정에 들어오며 가방 속에는 몇 개의 옷가지, 일용품들과 함께 책으로는 '성서'와 '겨울 부채'가 들어있었다.
'겨울 부채'는 일본의 진종불교(眞宗佛敎) 승려인 키요자와 만시(1863-1903)의 짧은 종교 에세이 9편이 들어있는 소책자이다. 번역은 이현주 목사님이 했다.
불교 승려가 쓰고 개신교 목사가 번역한 책을 천주교 수녀원에 피정을 들어와서 탐독을 한 것이 별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은 내 신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르게 말하면 내 신앙에 대한 확신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불교 승려가 쓴 글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도 각 종교들 밑바탕에는 같은 진리의 대하가 흐르고 있다고 믿는다.
흔히 기독교와 불교를 나눌 때 타력종교냐, 자력종교냐로 구분한다.
그런데 일본의 정토종(淨土宗)이나 진종(眞宗) 불교는 기독교와 비슷한 타력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이쪽 글들 중에서 몇 개 용어만 바꾸면 기독교적인 논지와 구별하기가 어렵다.
키요자와는 종교의 알짬을 자유와 해방으로 본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자유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란 석가모니의 삶을 재체험하는 것이다.
종교간의 대화도 이런 서로 공통되는 것부터 시작해서 공감대를 넓혀나간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겨울 부채'에 실린 글 중에서 두 편을 다시 읽어본다.
<깨어 있음 >
우리의 삶을 완벽하고 튼튼한 토대 위에 세우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튼튼한 바탕 없이는 우리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될 것이다. 그것은 구름 위에서 곡예를 부리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재주넘기다. 곡예사들은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다.
사람이 어떻게 완벽하고 튼튼한 토대를 마련할 것인가?
내 생각으로는 무한자(無限者, the Infinite) 또는 절대자(絶對者, the Absolute)와 만남을 통해서만 거기에 이를 수 있다.
무한자가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그런 것은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무한자는 그를 찾는 자가 발견하는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무한자가 안에 있다 또는 밖에 있다 하고 정의내릴 수 없다.
무한자를 만나지 않고서는 누구도 든든한 토대 위에 설 수가 없다. 그것을 통하여 완벽하고 든든한 토대를 얻게 되는 내적(內的) 발전의 과정 -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정신적 깨어 있음(spiritual awarenes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깨어 있음'은 스스로 충분히 만족함(contentment)을 뜻한다.
깨어 있는 사람은 사물이나 사람을 추구하다가 낙담하거나 실망하는 일이 없다. 어쩌다가 밖에 있는 대상(對象)을 추구하게 되어도, 무엇이 부족하다는 느낌에서 하지는 않는다. 깨어 있는 사람이 어찌 불만을 느끼겠는가? 그는 사물과 사람의 유한하고 제한된 세계가 아닌, 무한자(無限者) 안에서 만족을 찾는다.
그러나 깨어 있음이 우리로 하여금 주변 세계에 무관심한 존재가 되게 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선명하게 깨어 있을수록 우리는 낙담하거나 실망하는 일 없이 사람들을 상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모든 체험을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의미있는 부분으로 바꿀 수 있다.
'유마경(維摩經)'의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은 우리가 어떻게 깨어 있는 마음으로 바깥 경계를 상대할 것인지 적절하게 말해주고 있다.
사람 마음이 깨끗해지는 만큼
부처님 땅[佛國土]도 깨끗해지느니
우리가 다만 '깨어 있음' 안에서 자족하기를 강조하기 때문에, 비판자들은 우리가 남에 대해서 무관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참된 '깨어 있음'은 자기에 대한 지나친 관심도 아니고 남에 대한 무관심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먼저 자신의 든든한 토대를 마련하기까지는 남이 그것을 마련하도록 도와줄 수 없음을 인정할 뿐이다.
자신의 토대를 든든하게 마련한 뒤에야 남들과 그것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먼저 자신을 위하여 그것을 세우도록 힘써야 한다. 그것이 '깨어 있음'의 상태로 나아가는 순서다.
그런즉 깨어 있는 사람은 남들과 사귀기를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환영한다. 그 사귐은 자신과 남의 행복을 함께 증진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깨어 있음은 결코 은둔자(隱遁者)나 독거자(獨居者)의 강령(the creed)이 아니다. 오히려 평화스런 협력을 통하여 나라와 인민의 행복을 고무하고 촉진한다.
'깨어 있음'은 '절대 자유(絶對 自由)'를 누리는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가 겪는 장애는 모두가 스스로 만든 것이지 남들이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다. 남에게 절대 자유가 있듯이 우리에게도 절대 자유가 있는데 그들의 자유와 우리의 자유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이것이 깨어 있는 사람으로 사는데 필요한 이상적(理想的) 인간 관계다.
그런데 왜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는 우리의 자유와 남의 자유가 충돌을 일으키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자유가 '절대 굴종(absolute submission)'과 나란히 성립되는 '절대 자유(absolute freedom)가 아니기 때문이다. 깨어 있음에서 오는 절대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떤 처지에서도 남의 자유에 화(和)를 이루어 주는 태도를 기꺼이 갖추도록 해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자유가 남의 자유와 충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굴종에 연관하여 반드시 짚고 넘어갈 중요한 문제가 있다.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좌절과 비탄이 그것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모든 고통을 그릇된 견해에서 생겨나는 환각(幻覺)으로 보아야 한다는 불변의 원리를 언제나 기억한다.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남에게 고통을 주는 원인이 아니듯이 남도 나에게 고통을 주는 원인이 아니다. 비록 남의 손에 고통을 당하는 때가 있지만, 깨어 있으면 그 모든 고통이 나의 그릇된 견해에서 오는 것임을 보게 된다.
우리가 맑게 깨어 있을수록 그릇된 견해로 말미암은 고통은 사라질 것이고 우리는 든든한 토대 위에 설 것이다.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 순간에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 속에 모든 것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最上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바깥 사물이나 사람을 추구하는데서 오는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 깨어 있음은, 평화스런 협력을 통하여,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킨다.
완전한 자유(perfect freedom)와 완전한 굴종(perfect submission)은 적대적이 아니다. 둘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충돌하지 않는다. 그런 자유를 즐겨 누릴 때 우리는 자신과 남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고통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신심(信心)의 조건 >
이 짧은 글에서 나는,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종교적 신심(religious conviction)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신심(信心)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그것을 위한 근본 조건들에 관하여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일에 실패하는 경우가 있음을 자주 본다.
무엇이 신심(信心)을 얻기 위한 근본 조건인가?
신심을 얻고자 한다면 종교 그 자체 말고 다른 무엇도 의존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 자신의 경험을 미루어서 말하는 것이다.
재물, 가족, 친구, 부모, 형제, 자매, 경력, 능력, 교육, 지식, 국가 따위를 문제삼아서는 안 된다. 그것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완전 독립하기까지는 신심(信心)을 얻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게 좋다. 또한 우리는 가정, 재산, 가족을 등지고 떠나는 세상 포기의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신심을 얻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신심(信心)이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인간을 초월하는 힘[他力]을 의존함으로써 얻게 되는 내적(內的) 평안이 곧 신심이다.
그동안 종교에 무관심해 온 사람이 종교적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인간 세상에 대한 미망(迷妄)에서 깨어났다는 표시다.
그는 두 마음을 품고 있다. 한편으로는 세상에 대한 미망에서 깨어 났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묶여 있다. 그것은 마치 한 발은 앞으로 나가려 하고 다른 한 발은 뒤로 물러서려는 것과 같다. 어떻게 하면 그가 스스로 굳건히 설 수 있을 것인가?
종교는 이 세상에서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따라 가야 하는 그런 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너머로 가서 닿는 길이다.
그 길을 가려면 세상 모든 것에서 독립되어야 한다.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간 사람은, 이 세상을 의존하면서 신심을 얻을 수 있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자가당착이다. 신심을 얻고자 진지하게 마음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자기 노력에 대한 모든 의존에서 떠나야 한다.
정토승(淨土僧) 겐신(源信, 942-1017)은 말했다.
예토(穢土)를 싫어하여 멀리 떠나네
정토(淨土)에 태어나기를 기꺼이 구하네
충신(忠信)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정부(貞婦)는 두 남편을 모시지 않는다.
한 가지 일에 흠뻑 빠져든 사람은 다른 일로 헛갈리지 않는다.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사람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 이 세상에 만족하지 못하여 종교적 신심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종교에 내어 맡겨야 한다. 다른 모든 것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한다.
얼마만큼 진보한 단계에 이르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처음 시작할 때에는 인간의 세계와 여래(如來)의 세계를 함께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충성스럽지 못한 신하다. 정절을 지키지 않는 아내와 같아서 결코 종교 생활에서 오는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종교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당신의 삶으로 본(本)을 보여주신 것처럼 부모, 처자, 재물에 국가까지 버려야 한다.
나아가서 그는 자기 자신까지도 버려야 한다. 달리 말해서 부모에 대한 사랑이나 조국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을 종교에 대한 관심보다 못한 것으로 여겨 모두 포기해야 한다.
그밖에 다른 관심들, 정의, 도덕, 과학, 철학 따위에 관한 관심들을 모두 끊어버릴 때까지는 신심(信心)의 놀라운 세계가 졀코 우리 앞에 그 문을 열지 않는다.
누군가 물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산 속에 홀로 머물기 위하여 집을 떠나야 하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한다. 모든 사람이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산 속에 홀로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산중 생활을 비판하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몸으로 산에 들어가 있든, 집안에 있든, 상점에서 일하든, 낚시나 사냥을 가든, 학교에 다니든, 아니면 군대에서 복무를 하든,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문제는 마음으로 가정, 직장, 가족, 친구, 조국, 교육, 지식 따위에서 떠나 오로지 부처님의 정신(spirit of the Buddha)을 의지처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생선을 먹고, 재물을 소유하고, 명예와 지식을 즐기는 일은 좋은 일이다. 집에 있어도 좋고, 산에 들어가도 좋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일은, 진심으로 종교를 믿고자 하는 자는 그런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헛갈리거나 어지러워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오직 부처님의 정신에 몰입해야 한다.
부처님의 자비로우신 빛으로 눈이 밝아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싫어하거나 멸시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든 것이 사랑하고 공경할 만한 것들이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모두 제 빛을 내뿜는다. 그렇게 되면 삶은 온통 낙관(樂觀)으로 채워지고 세상은 가장 훌륭한 가능성 자체가 된다.
내면(內面)의 자족(自足)에 이르는 것이 신심(信心)의 정점(頂点)이다.
그 자리에 설 때, 처자식의 존재가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으며 그들이 죽는다 해도 못 견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생선을 즐겨 먹지만 생선이 없다 해서 불평하지 않는다. 재물을 즐기되 그 모든 재물이 없어져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높은 벼슬자리에 앉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 아까워하지 않는다. 지식을 탐구하되 남보다 더 안다 해서 뽐내지 않고, 남보다 덜 안다 해서 주눅들지 않는다.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산 속에서 밤 하늘 별을 보며 잠자리에 드는 것을 경멸하지 않는다. 좋은 옷을 입지만 그 옷이 더러워지고 찢어져도 태연하다. 이와 같은 품성을 지녔기에 신심(信心)을 얻은 사람은 자유인(自由人)이다. 아무 것도 그를 가두거나 가로막지 못 한다.
이런 경지에까지 이르렀을 때 그는 도의적(道義的)인 삶(a moral life)을 살 수 있게 된다.
학문을 탐구할 수도 있고, 정치나 사업에 발을 들여놓을 수도 있다. 낚시나 사냥을 할 수도 있고, 조국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총을 매고 전장에 나갈 수도 있다.
과연 '삶의 모든 수단이 부처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룬다'(법화경)는 말 그대로인 것이다.
어딘가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의 일상 생활이 곧 불교(Buddhism)다. 불교가 우리를 입히고 먹인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들을 시중든다. 걷고 서고 앉고 눕는 것이 곧 불교다.
레뇨성인(蓮如聖人)은 진정한 종교인이 세상 일에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임금의 법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한다. 모든 것 앞에 법전을 놓고 세상 상식에 맞추어 그것들을 지켜야 한다. 그대가 만일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내적인 평안을 얻었거든, 그것을 가슴 속 깊이 소중하게 간직해 두도록 하라.
나는 이보다 더 위대한 원리를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참으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