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고마운 천적

샌. 2013. 11. 18. 09:14

윗집 때문에 생활 패턴이 변했다. 일찍 잠자리에 들던 것이 자정 이후로 늦춰졌고, TV를 보는 시간도 늘었다. 아파트 층간소음 때문이다.

 

어린아이 둘이 있는 윗집은 밤 10시가 넘으면 소란이 시작된다. 그 시간이 되어야 가족이 다 모이는 것 같다. 짧으면 한 시간 정도지만, 길면 1시까지도 이어진다. 잠이 들었다가도 쿵쾅대는 소리 때문에 깬다. 다시 잠들기 위해서는 소란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신경이 쓰이면 책을 읽어도 집중이 안 되고 아무것도 못 한다. 소음에는 마인드 컨트롤도 안 통한다. 그래서 TV를 크게 틀어놓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너무 심할 때는 인터폰으로 연락하지만 자주 싫은 소리 하는 것도 서로에게 스트레스다. 말을 해봤자 감정만 상하지 별 효과도 없다. 어린아이 발목에 족쇄를 채울 수도 없고 어쩌겠는가. 차라리 내가 참는 게 낫다. 그래서 내 생활 리듬도 윗집을 닮아가고 있다. 아파트에서는 위층이 갑이다.

 

층간소음 문제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 잘못되었다 할 수 없다. 부부만 사는 우리 집은 워낙 조용하니까 이웃 소음이 훨씬 더 크게 들리는지 모른다. 같이 아이를 키우는 집이라면 위층은 지금보다는 덜 신경 쓰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소리에 예민한 아래층 때문에 위층도 애로가 많을 것이라 이해가 된다. 서로가 이웃을 잘못 만난 셈이다.

 

아내 말로는 우리도 자식 키울 때 비슷했다고 한다. 위층만 나무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웃에게 주었던 고통의 업을 지금 소멸시키고 있다고 믿으면 조금은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나쁜 이웃도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

 

소음은 아파트의 편리를 택한 대신 응당 감내해야 할 몫이다. 호텔처럼 카펫을 깔지 않는 한 이웃집 생활 소음을 피하기는 어렵다. 건축을 탓하지만 결국은 사람의 문제다. 이웃간에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만 있다면 마찰의 상당 부분이 해소될 것이다.

 

활어를 멀리 운반할 때는 천적이 되는 물고기를 함께 집어넣는다고 한다. 활어는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적당한 긴장과 스트레스를 주어야 생선이 도착지까지 죽지 않고 살아갈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너무 편안하면 삶이 무료하고 시들해진다.

 

그런 관점에서 위층을 바라볼 때 고마운 천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게을러 움직이기 싫을 때도 위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운동하러 나간다. 상대적으로 낮의 고요가 더없이 감사하다. 여기에 안주하는 대신에 또 다른 터로의 변신을 꿈꾼다. 그로 인해 예상치 못한 만남이 생길 수도 있다. 별 자극이 없는 생활에서 위층은 지속적으로 긴장을 시켜주면서 내 편안한 삶을 흔든다.

 

어쩌면 머지않아 이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갈 곳이 어디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마당 있는 집에서부터 작은 오두막까지 머리는 이런저런 그림을 그린다. 유혹하는 곳도 있지만 과거와 달리 쉽게 결단을 내리지는 못하겠다. 이도저도 안 되면 고마운 천적에 쫓기며 계속 살 수도 있다.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를 얻는 게 세상사의 원리다. 위층은 얄미운 이웃, 고마운 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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