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는 장날이다
장날 거리에 녕감들이 지나간다
녕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쭉재비상을 하였다
개발코를 하였다 안장코를 하였다 질병코를 하였다
그 코에 모두 학실을 썼다
돌체돋보기다 대모체돋보기다 로이도돋보기다
녕감들은 유리창 같은 눈을 번득거리며
투박한 북관北關말을 떠들어대며
쇠리쇠리한 저녁해 속에
사나운 즘생같이들 사라졌다
- 석양 / 백석
1938년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에서 영어 선생을 하고 있을 때 쓴 시다. 일제 말기에 접어든 그때는 한글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민족혼을 말살하는 정책이 시작되었다. 영생고보에서도 응원가를 일본말로 개사하도록 해서 학생들이 응원가 불창 운동을 전개하는 등 저항 정신이 높아지던 때였다.
그런 배경에서 보면 이 시는 한민족의 강건한 정신을 나타낸 것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장날 거리에 나온 노인들의 모습에서 싱싱한 야성이 보인다. 이 정도의 기백이라면 총칼이 무섭다고 민족혼이 사라지는 일은 않을 것이다. 또한 이 시는 한 장의 스냅 사진을 보는 것 같다. 언어나 감정의 낭비가 없이 깔끔하다. 백석 시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투박한 북쪽의 토속어도 그저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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