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마교사전

샌. 2011. 5. 21. 08:58

문화대혁명 시기에 지식 청년 한소공(韓少功)은 산간오지인 마교로 하방되어 강제 노동에 종사하게 된다. 낯설고 물 선 그곳에서의 경험이 뒤에 <마교사전>(馬橋詞典)이라는 소설로 태어났다. 이 소설은 특이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마교 사람들이 쓰던 115 개의 단어를 중심으로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마교는 현대문명과는 단절된 산골의 작은 촌락이다. 소설에는 문명으로 오염되기 이전의 인간 본연의 모습이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다.

소설은 주된 줄거리가 있는 전통적인 형식을 떠나 모든 사건들이 병렬적으로 전개된다.우리 삶은 여러 개의 인과의 실마리가 교차하는 가운데 꾸려지고 있다. 전통적인 소설의 방식은 주된 줄거리가 작자와 독자의 시야를 독점함으로써 주변을 돌아볼 수 없게 하는 단점이 있다. 작가가 사전의 형식을 취한 것은 마교의 사람들과 삶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데 가장 적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작가는 언어야말로 삶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말은 그 시대 사람들의 가치체계를 반영하며 삶을 좌우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마교사전>이 인상적인 것은 인간 삶의 원형을 담아냈다는 점이다. 미워하고 사랑하며 생존하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고 광활하게 펼쳐진다. 마치 우리가 잃어버린 고대세계의 무대로 돌아간 듯하다. 동시에 문화대혁명과 문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화하는 마교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디에 어느 시대에 살던 인간 본연의 공통의 정서가 감동을 준다. 인간 삶의 바탕은 슬픔이고 비애지만그래서 숭고하고 아름답다. 혁명의 광기도 결국 인간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소설에는 이런 사연도 나온다. 먼 곳으로 시집간 누나는 혼자 사는 동생이 늘 걱정이 되었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결혼할 수도 없었다. 가끔씩 누나가 찾아와 도움을 주었다.

‘누나가 친정에 올 때면 어쩔 수 없이 남동생인 염조와 한 침대를 써야만 했다. 어느 날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밤이었다. 한밤중에 일어난 누나는 발밑이 텅 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염조가 몸을 웅크리고 침대 밑에 앉아 있었다. 아예 잠을 자지 않은 듯 어둠 속에서 고양이처럼 흐느끼고 있었다. 누나가 연유를 물어보았으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부뚜막에 가서 새끼를 꼬기 시작했다.
끝내 누나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부뚜막으로 다가간 누나는 떨리는 두 손으로 동생 손을 잡으려 했다.
“참지 못하겠으면 날 집안 식구로 보지 말고 그냥 모르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대충 그냥 한 번만이라도 여자의 맛을 느껴 보렴.”
그녀의 머리는 엉클어져 있고, 이미 속옷 매듭이 풀려 있었다. 백옥 같은 젖가슴이 동생의 놀란 눈앞에 열려 있었다.
“어서 이리 와. 뭐라고 하지 않을게.”
염조는 도망치듯 문을 뛰쳐나가 비바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부모님 묘를 찾아가 한바탕 실컷 통곡을 했다.
이튿날 아침 집에 돌아오니 누나는 벌써 돌아가고 없었다. 찐 고구마 한 사발과 곱게 빨아 잘 기운 저고리 몇 벌이 침대에 놓여 있었다. 그 뒤로 누나는 다시는 집에 들르지 않았다.’

소설에는 노장사상을 반영한 듯한 인물도 나온다. 신선부에 살고 있는 사대금강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소유로 산다.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건달이라고 놀리지만 그들은 세상 체제를 무시하며 자유롭게 살아간다. 하루 종일 한적하고 즐겁게 지내며 바둑을 두거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고 높은 곳에 올라 풍경을 감상한다. 잠도 아무 데서나 잔다. 세속의 모든 잊었지만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다. 비록 소수지만 이런 세계관은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중국의 전통 정신이다.

<마교사전>은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생이란 무엇인지를 숙고하게 하는 깊이 있는 소설이다. 그러면서도 재미가 있다. 600 페이지가 넘는 장편이지만 쉽게 읽힌다. 인간과 인간이 겪는 고통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녹아 있는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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