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세월의 쓸모

샌. 2015. 9. 22. 08:23

학교 동기를 만나면 의레 옛날이야기가 나온다. 공유하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지 모른다. 이런 감정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진해진다. 동기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50년대와 60년대에 유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같은 추억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각자가 경험한 공간은 다르지만 시기의 겹침이 정서적 유대감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추억은 팍팍한 현실을 견뎌내는 힘이 되어준다. 이 책 제목이 말하는 '세월의 쓸모'도 아마 그런 뜻이리라. 지은이인 신동호 시인은 춘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장소는 달라도 시인의 얘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를 만나고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낡은 것, 지나간 것에 대한 향수가 살아난다.

 

시인의 말처럼 과거를 추억하다 보면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불연속선상에 있다는 걸 느낀다. 세월은 연속으로 흘러왔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앨범을 보면 어릴 때 나는 너무나 생경하다. 시간은 기억과 맞닿자 산산이 흩어진다. 과거를 추억한다는 건 어떻게든 그 연결 고리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러면 지금의 나 역시 소중하다는 걸 지나온 세월이 말해준다.

 

<세월의 쓸모>에는 글과 함께 옛 사진이 실려 있어 더욱 그 시절을 그립게 한다. 책에서 시인이 과거의 추억 목록으로 뽑은 건 다음과 같다. 

 

숨바꼭질

극장

강촌역

방앗간

이발소 그림

등화관제

겨울 경춘선

동네 목욕탕

종로서적

오징어놀이

국기하강식

골목

구슬

연탄

아이스케키

고무신

한반도 모양 자

화토

파카 45

경월소주

비둘기호

서울우유

라라

롬멜 전차

스피드 스케이트

양미리

라디오 키트

간드레 불빛

원기소

못난이 삼형제

짐자전거

은하수

공중전화

똘이장군

별이 빛나는 밤에

여로

미제 아줌마

편지

 

그중에서 시인의 감성을 읽을 수 있는 글 한 편을 옮긴다.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글이다.

 

편지

 

편지지를 사는 버릇은 사춘기의 흔적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은 마음에 머물지 않는다. 마음에서 오른쪽 어깨를 거쳐 손끝까지 가 꼬무락거린다. 가끔 오른손 검지 끝이 간지럽다면 그리운 이가 생겼음이 틀림없다.

 

퇴근길에 줄이 없는(반드시 줄이 없어야 한다) 편지지를 사고 1.0밀리미터가 넘는 굵은 펜(얼른 손끝의 것을 빼내기엔 굵을수록 좋다)을 사자. 물론 편지를 쓰지 않아도 손끝이 곪는 일은 없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마음이 곪아 터진다.

 

글씨는 곧 마음이다. 마음을 최대한 연장시킨 그 끝이 글씨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렇다. 마음이 신경세포를 타고 손끝으로 간다. 손끝의 근육과 살, 뼈가 협동하여 펜을 잡고 펜 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에만 글씨는 현현한다.

 

경험하셨을 터, 마음을 표현하려 애쓴다고 편지에 마음이 온전히 담기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개성이 담긴 글씨를 쓰려고 노력해보라. 신기하게도 그렇게 표현이 어렵던 그리움의 언어가 남겨진다. 편지 쓴 날, 그 편지 끝 4월 1일, 숫자에도 사랑이 담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우체통까지 가는 길은 그리움 가까이로 가는 길이다. 가령, 길가에 흔한 플라타너스 가지에 버짐 자국이 보였다면 당신은 다시 태어난 것이다. 편지를 잃지 않았는지 속주머니를 몇 번 확인했다면 그거야 뻔하다. 사랑에 빠진 것이다. 우표를 사 봉투에 붙일 때(반드시 우표를 혀에 대고 침을 묻혀야 한다. 풀을 바르는 행위는 불경하다.) 오른 손 엄지의 압력은 그리움의 크기다.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돌아서 가다가 다시 뒤돌아보라. 가슴이 먹먹한 건 거기 마음을 두고 왔기 때문이다. 마음이 답장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 시간이 어른이 되어 가는 시간이다. 물론 그리움의 흔적은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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