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얼굴을 꾸민다고 했다. 지금 지백이 나를 알아주었으니 내 기필코 원수를 갚은 뒤에 죽겠다. 이렇게 하여 지백에게 은혜를 갚는다면 내 영혼이 부끄럽지 않으리라."
그러고는 마침내 성과 이름을 바꾸고 죄수가 되어 조양자의 궁궐로 들어가 변소의 벽을 바르는 일을 했다. 몸에 비수를 품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양자를 찔러 죽이려는 생각이었다.
양자가 변소에 가는데 어쩐지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그래서 변소 벽을 바르는 죄수를 잡아다 조사해 보니 그가 바로 예양이었다. 그의 품속에는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예양은 이렇게 말했다.
"지백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 했소."
그러자 주위에 있던 자들이 그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그때 양자가 말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삼가여 피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지백이 죽고 그 뒤를 이을 자식조차 없는데 그의 옛 신하로서 주인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 하였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천하의 현인이다."
그러고는 드디어 그를 풀어 주어 떠나가게 했다.
- 사기(史記) 26-1, 자객열전(刺客列傳)
'자객열전'에는 조말, 전제, 예양, 섭정, 형가, 다섯 명의 자객이 나온다. 이중에서 예양(豫讓)은 진(晉)나라 사람으로 지백(智伯)을 섬겼는데, 지백은 예양을 대단히 존경하고 남다르게 아꼈다. 지백이 조양자(趙襄子)와의 싸움에서 패하자 지백만 아니라 집안 전체가 멸문지화를 당했다. 심지어 조양자는 지백의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술잔으로 썼다. 이때부터 예양의 복수혈전이 벌어진다.
본문 내용은 예양이 변소에 숨어서 양자를 살해하려다가 들키는 장면이다. 여기서는 예양의 충성심보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객을 대하는 양자의 태도가 더 돋보인다. 모시던 옛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한 예양의 행동을 의롭다고 평가하며 살려준다.
그런다고 예양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걸인으로 위장하여 양자가 다니는 다리 밑에 숨어 기회를 노렸다. 살기를 느꼈는지 양자가 다리 위를 지날 때 말이 놀라 날뛰니 예양은 다시 잡히고 말았다. 예양은 말했다.
"신은 죽어 마땅하나 모쪼록 당신의 옷을 얻어 그것을 칼로 베어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이루도록 해 주십시오."
양자는 예양의 의로운 기상에 감탄하여 자기 옷을 건네주었다. 예양은 칼을 뽑아들고 세 번을 뛰어올라 옷을 내리쳤다. 그리고 칼에 엎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복수를 하기 위한 예양의 집념이 대단하지만 양자의 대인배다운 태도에도 주목한다. 마지막에는 자기 옷까지 건네줘서 예양이 스스로 만족하도록 배려했다. 승자의 여유일까. 불꽃 튀는 인간사에서 이 정도의 온기나마 있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