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새론 배우를 처음 안 건 10여 년 전 영화 '여행자'를 통해서였다. 영화에서 김새론은 해외입양을 기다리며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진희 역을 맡아 진한 감동을 주었다. 어린이임에도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는 뛰어난 연기로 나중에 대배우가 될 거라는 예감을 가졌고, 이 배우를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16일에 김새론 배우가 극단적 선택을 하여 유명을 달리했다. 한창 뻗어나갈 25살의 아까운 나이였다. 보도로는 3년 전 음주운전 사고로 작품 활동이 중단된 후 악플과 생활고에 시달렸다 한다. 짧은 보도만으로 저간의 사정을 헤아리기 힘들지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실수를 한 인간에 대해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지를 묻는다. 그렇다고 음주운전을 변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 잘못에 대한 대가는 응당 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파멸에 이를 정도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고 후에 고인의 처신에서 문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 아쉬운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고인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도 많았을 것이다. 공개적인 활동을 하려고 하면 돌팔매가 날아들어 숨어야만 했다.
세상이 점점 각박해져 가고 있다. 용서와 관용의 정신은 찾아보기 어렵다. 칼날 같은 단죄만 있을 뿐이다. 최근의 탄핵 정국에서 상대 진영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서로를 혐오하고 증오한다. 너를 죽여야 내가 산다고 믿는다. 너그러움이나 역지사지의 정신은 털끝만큼도 없다. 개인도 집단과 다르지 않다. 마음이 여린 사람은 감내하기 힘들 것이다. 더 나쁜 짓을 저질러도 뻔뻔한 인간은 도리어 큰소리치며 살아가는데 말이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예수의 말씀이다. 서로를 낭떠러지로 밀어넣어야 직성이 풀린다면 인간의 모습을 한 사회가 아니다. 배우 김새론의 죽음은 상당 부분 우리 사회에도 책임이 있는 게 아닐까. 인격 살인으로 타인을 죽음으로 내몰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차가운 피가 내뱉는 정의는 정의일 수 없다.
영화 '여행자'에서 진희는 스스로 땅을 파고 누워 흙으로 몸을 덮으며 세상과 단절하려고 한다. 고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며 이 장면이 떠올랐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김새론 하나만이 아닐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아주는 따스한 우리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해지지 말고 굳건히 서서 이겨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죽을 결심으로 왜 살지 못하느냐는 흔한 말도 죽음 뒤에는 의미가 없다. 10년 정도 배우를 떠나 힘든 세상살이를 경험할 각오를 했더라면 나중에 더욱 원숙한 배우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쓸데없는 상상도 한다. 너무 안타까워서 드는 생각이다.
"잘못을 저지르고, 배우고 고쳐보려고 노력하고, 실수를 수습하고, 내가 그랬으니 남을 이해하고, 그러나 이해하지만 용서는 안 되어 괴로워하고, 그러다가 다시 이해가 되는 국면을 맞기도 하고, 내일 죽더라도 오늘 사과하고 반성하며, 그렇게 인식의 몸부림을 치면서, 우리는 겨우 인간이 되어간다." 은유 작가의 말이다.
고 김새론 배우를 애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