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두 친구

샌. 2025. 3. 19. 09:57

자주 만나지 못하는 두 친구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둘 다 첫마디가 "참 오랜만이다!"였다. 40대 때만 해도 한 해에 두세 번은 만났는데 그 뒤로는 빈도가 점점 떨어졌다. 그러다가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묻게 되고, 그마저도 해를 넘기기 일쑤였다. 늙어지면 대개 그렇게 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천태만상이다. 같은 인간인데 어쩜 이리 다양할까, 신기한 생각이 든다. 처한 환경이나 사고방식, 건강 상태까지 각양각색이다. 젊을 때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노년이 될수록 삶의 스펙트럼의 폭이 확대되는 것 같다. 

 

A는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다리에 괴사에 생겨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받았다. 발가락을 잘라냈고 아직도 병원 치료중이다. 걷지를 못하니 바깥출입을 하지 못한다.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라 그래도 목소리는 밝았다. 어린 손주의 재롱을 보는 게 즐거움이라 했다.

 

A와는 30대 때 직장에서 만났다. 살던 집이 가까워서 함께 출퇴근을 하며 공유하는 생활이 많았다. 그때 A는 뚱뚱하긴 했으나 건강했다. 같이 술을 마시면 다음날 나는 빌빌거려도 A는 쌩쌩했다. 50대에 들어서면서 당뇨가 있다는 얘기를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작년에 발을 잘라낼 지 모른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눈도 어두워진다고 했다. 저간의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당뇨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A는 실토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의사 말을 잘 들어야 해."

 

B는 중고등학교 동기면서 20년 전 쯤 천주교 세례를 받을 때 내가 대부를 섰다. 지금은 둘 다 냉담중이고 서로 소원해진지 꽤 됐다. B는 지난달에 부부가 같이 한 달간 남미 여행을 다녀왔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파타고니아, 우유니, 이과수, 마추픽추 등을 직접 본 감동이 어조에서 드러났다. 여행 경비로 5천만 원을 넘게 썼다고 했다.

 

돈도 돈이지만 70대 중반에 남미 여행을 할 정도의 체력이 부러웠다. 당연히 패키지 팀에서 최고령이었다고 한다. 이젠 어딜 가나 우리 나이면 넘버 원이 된다. B 부부는 양평에 사는데 일주일에 반은 서울에서 보낸다. 중증 장애인인 손주를 돌봐줘야 하기 때문이다. 딸과 사위는 자기들을 위해 애쓰는 부모를 위해 일 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보내준다. 이번에는 남미였으니 거하게 다녀온 것 같다.

 

딸을 낳으면 비행기를 탄다는 옛말이 맞다고 대꾸했으나 정상인으로 크지 못하는 손주를 보살펴야 하는 친구의 심정이 어떠할지 나는 헤아리지 못한다. 비행기를 못 타더라도 손주가 건강하게 커 주실 바라는 게 모든 할아버지 할머니의 소망이 아니겠는가.

 

두 친구를 돌아보며 나는 내가 있는 위치를 확인한다. 아직까지는 건강에 큰 무리가 없고, 자식이나 손주들도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 해외여행을 갈 형편이 못되어도 괜찮다. 감사한 걸 찾으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크건 작건 우환을 가지지 않은 집이 얼마나 될까.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 게 인생이다. 결핍이 가족을 하나로 뭉치고 우애를 다지는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행복해질 자격이 만족할 조건을 가진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황금 침대에서 잔다고 좋은 꿈을 꾸지 않는다. 도리어 많이 누리고 있는 사람이 불만이 큰 것을 본다. 두 친구가 힘든 조건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찾으며 잘 살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A는 휠체어 대신 지팡이를 짚고 나올 희망을 말하며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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