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승부

샌. 2025. 5. 20. 10:50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제 대결을 소재로 한 바둑 영화다. 1990년부터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본 바 있기 때문에 옛날을 생각하며 흥미롭게 영화를 봤다.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여 키우지만 몇 년이 되지 않아 제자의 도전을 받고 타이틀을 하나씩 빼앗긴다. 사제간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영화는 잘 보여준다.

 

기록을 보면 둘은 300번이 넘는 사제 대결을 펼쳤다. 이창호의 승률이 60%를 넘었고 중요한 타이틀전에서는 70%대의 승률을 기록했다. 영화에서는 이창호가 처음으로 스승으로부터 타이틀을 뺏는 대국이 비중있게 나온다. 1990년의 최고위전으로 이창호가 3:2로 이기면서 우승했다. 그 뒤 조훈현은 이창호를 독립시켜 내보내고 제자를 이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바둑 한 판 둘 때마다 서너 갑씩 피우던 담배도 끊고 체력을 연마한다. 영화는 마지막에 조훈현이 국수위를 탈환하는 것으로 끝난다. 

 

두 기사 모두 현대 바둑을 대표하는 천재 기사다. 조훈현 하면 1889년의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응씨배 우승이 떠오른다. 이 승부는 한국을 바둑의 변방에서 중심국으로 변화시킨 대사건이었다. 뒤이어 이창호가 등장했고, 이세돌, 신진서로 이어지며 현재까지 세계 바둑계을 휘어잡고 있다. 영화 '승부'는 한국 바둑의 격변기였던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조훈현을 무너뜨리고 이창호가 세대교체를 하는 시기를 담았다.

 

사제지간이지만 두 기사는 성격이나 바둑 스타일이 판이하다. 조훈현이 발 빠르고 전투적인 바둑을 두는 반면 이창호는 느리고 기다리는 바둑이다. 별명이 조훈현은 전신(戰神)이고 이창호는 돌부처다. 내제자로 들어간 초기에 조훈현은 이창호의 바둑을 못마땅해하며 기본을 중시하고 적극적으로 두라고 충고한다. 나중에는 제자의 바둑을 인정하게 되지만 처음에는 갈등이 있었을 법하다. 이창호는 자신의 스타일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자신만의 기풍을 완성한다. 이창호가 조훈현의 내제자였지만 얼마나 조훈현의 역할이 컸는지는 의문이다.

 

영화에서 어린 이창호가 조훈현을 만나서도 주눅들지 않고 어른에게까지 막말을 하는 등 당돌한 모습은 의외다. 이창호는 어릴 때부터 과묵하고 신중한 아이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구성상 이창호가 조훈현의 지도를 받으며 변했다는 것을 강조하려 한 것 같은데 사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창호는 조훈현이 아니었어도 지금의 이창호가 되지 않았을까.

 

조훈현 역의 이병헌과 이창호 역의 유아인 연기는 놀라웠다. 특히 유아인은 이창호를 그대로 빼닮았다. 대단한 배우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에서는 떠나는 이창호에게 조훈현이 아끼는 바둑판을 선물한다. 바둑판 뒷면에는 조훈현의 스승이었던 세고에의 말이 적혀 있다.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 바둑이다."

'바둑' 대신 '인생'이라는 단어를 넣어도 좋은 문장이 될 것 같다. 그러나 바둑은 이제 AI가 등장하면서 정답이 없다고 할 수 없게 되었다. 프로기사는 확신이 없을 때 AI에게 답을 묻는다. AI가 '바둑의 신'이 된 것이다. 프로기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최선의 수를 찾던 모습은 사라졌다. 이젠 각자 컴퓨터 앞에 앉아 AI의 가르침을 받는다. 누구누구 문하생이 아니라 모두가 AI 문하생이 된 셈이다. 영화 '승부'가 그린 세계는 그나마 마지막 낭만의 시대 풍경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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