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소박하게 성취한
우리들의 혁명을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살쾡이에게
진드기에게 악어에게 표범에게 승냥이에게
늑대에게 고슴도치에게 여우에게 수리에게 빈대에게
다치지 않고 깎이지 않고 물리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그러나 정글보다도 더 험하고
소용돌이보다도 더 어지럽고 해저보다도 더 깊게
아직까지도 부패와 부정과 살인자와 강도가 남아 있는 사회
이 심연이나 사막이나 산악보다도
더 어려운 사회를 넘어서
이번에는 우리가 배암이 되고 쐐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쥐가 되고 살쾡이가 되고 진드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악어가 되고 표범이 되고 승냥이가 되고 늑대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고슴도치가 되고 여우가 되고 수리가 되고 빈대가 되더라도
아아 슬프게도 슬프게도 이번에는
우리가 혁명이 성취되는 마지막날에는
그러나 사나운 추잡한 놈이 되고 말더라도
나의 죄 있는 몸의 억천만 개 털구멍에
죄라는 죄가 가시 같이 박히어도
그야 솜털만치도 아프지는 않으리니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 기도 / 김수영
'4.19 순국학도 위령제에 부치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1960년 5월 19일에 서울운동장에서 유가족과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혁명으로 희생된 영령을 위한 위령제가 열렸다. 시인은 위령제 전날 이 시를 쓴 것 같다.
역사는 반복된다더니 56년 뒤인 오늘의 상황도 그때와 비슷하다. 시인이 현재의 우리에게 보내는 시로 읽힌다. 4.19혁명은 18년 박정희 군사독재로 이어졌다. 1987년의 6.10항쟁도 같은 결과를 낳았다. 공들여 죽을 쒀서는 개에게 갖다 바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혁명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눈을 더 부릅떠야 한다. 황금과 불의의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대한민국이 새로운 나라로 도약하는 시발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4.19혁명으로부터 여기까지 내려온 미완의 과제다.
그러나 시를 쓰는 마음, 꽃을 꺾는 마음,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만으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이번에는 우리가 배암이 되고, 여우가 되고, 늑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나운 추잡한 놈이 되고 말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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