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공터에서

샌. 2017. 4. 23. 10:59

김훈의 근작 소설이다. 작가의 문체에 끌려 이 책을 찾아 읽었다. 김훈은 가장 개성 있는 작가다. 짧고 건조한 문장이 매력이 있다. 감정이 배제된 서술은 시베리아의 찬바람 같다. 이즈음에 더욱 만나고 싶은 글이다.

 

이 소설에서도 김훈의 문체는 도드라진다. 반면에 내용은 밋밋한 편이다. 그것 역시 작가의 특징인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김훈의 문체는 스케일이 큰 경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비장미를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현의 노래>에서 대규모 전투와 순장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이었다.

 

<공터에서>는 마 씨 가족 두 세대의 역사를 담았다. 일본 강점기 시대, 해방, 6.25 전쟁, 월남전, 군부독재 등 파란만장했던 근대사 속에서 살았던 힘 없는 민초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은이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시대를 극복해 낸 영웅보다는 시대의 물결에 휩쓸려 헐떡이거나 익사한 보통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작가가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김훈의 소설을 읽으면 인간의 숙명에 대해 한숨짓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가련한 존재들임을 각성시켜 준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기조차 힘들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좀 더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 아쉽다. 소설 중에서 김훈의 문체 특징이 잘 나타나는 한 곳을 골라본다. 마차세의 부인인 박상희가 임신했을 때의 느낌을 묘사한 부분이다.

 

"임신의 기별은 몸속 깊은 곳에서 움트는 이물감이나 어지럼증 같았다. 기별은 멀고 희미했는데, 점차 다가와서 몸 안에 자리잡았다. 낯선 것이 다가오고 또 자라서 몸 안에 가득 퍼져가는 과정을 박상희는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몸속의 어두운 바다에 새벽의 첫 빛이 번지는 것처럼 단전 아래에서 먼동이 텄다.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놀러 갔던 동해의 아침 바다는 어둠이 물러서는 시간과 공간 안으로 수평선 쪽에서 솟아오르는 빛의 입자들이 퍼졌고, 새로운 시간은 살아 있는 살끼리 부비듯이 다가왔다. 박상회는 스며서 가득 차는 빛들을 떠올렸다. 임신은 몸의 새벽을 열었다. 가끔씩 안개 같은 것이 목구멍을 넘어왔다. 몸속을 덮은 안개 속에서 해독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수런거리면서 아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발생하지 못한 세포들이 숨 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우주공간을 날아가는 별들의 소리 같기도 했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무어라고 말하고 있었고, 말하고 있었지만 아직 말이 되어지지 않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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