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선풍기 / 이정록

샌. 2017. 8. 17. 10:51

우리 집

선풍기는 열한 살

나랑 동갑내기, 땀 뻘뻘

일을 해도 "어이구 고물!

아이구 저 늙다리!"

구박받네

도리질하던 선풍기

갑자기 고개를 끄덕끄덕

 

- 선풍기 / 이정록

 

 

선풍기 하나가 고장 나서 남은 선풍기가 거실과 안방을 들락거리느라 바빴다. 여름 시작하면서 청소한다고 선풍기를 뜯었다가 부주의로 날개를 조이는 플라스틱 캡이 부러졌다. 간단한 부품 하나가 없어 멀쩡한 선풍기가 방 한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혹시 길거리에 버려진 선풍기가 없나 열심히 살폈으나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속담 그대로였다. 옛날에는 골목마다 전파사가 있어서 무엇이든 간단히 수리할 수 있었다. 요사이는 대기업 제품이 아니면 고치기가 쉽지 않다. 고쳐서 쓴다는 인식도 자연스레 사라지고 있다.

 

글자가 이루는 모양도 선풍기를 닮은 재미있는 시다. 고물, 늙다리라고 구박하니까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만큼 사람과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뜻일까. 열한 살 아이와 동갑내기인 오래된 물건의 사연이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