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45세의 노산老産이었다. 위로 줄줄이 딸 넷, 또 딸을 낳았다. 분만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산모는 퇴원을 서둘렀다. 아기는 병원에서 맡아서 처리하란다. 키울 마음도 없고 형편도 어렵단다. 조금 있으니 남편이 나타났다. 50세는 되어 보이는 이 택시기사 아저씨는 한수 더 뜬다. 열이든 스물이든 아들 하나 낳을 때까지 계속 아기를 낳겠단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이 아주머니 또 배가 불룩하니 병원을 찾았다. 아들인지 딸인지 좀 봐달라며 턱을 세우고는 다가앉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설득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 가운을 벗어버리고 진료실을 도망쳐 나와 버렸다. 더럽고 아득한 절망감이 종일 가시지 않았다. 소름이 끼쳤다.
둘. 30대 후반의 꼽추 아주머니가 조심조심 진료실을 들어섰다. 초음파를 보니 임신 9주. 그녀로서는 첫 임신이었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아기가 안 생겼단다. 자기더러 아기도 못 낳는 병신이라며 동갑내기 역시 꼽추인 남편이, 술만 마시면 마누라를 폭행하고 구박해 양쪽 고막이 다 터졌단다. 병원을 나간 지 채 10분도 안 되어 돌아와서는 이 아주머니 아기를 없애야겠단다. 그러면서 아기아빠가 누군지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며 언제 아기가 들어섰는지 가르쳐 달란다. 리어카에 카세트테이프를 팔던 이 아주머니 옆 리어카의 시계 파는 남자와 눈이 맞았단다. 모든 희망의 말을 섞어 달래 보낸 이 아주머니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셋. 만 15세 OO여중 3학년 임XX양. 이 학생은 나의 단골환자다. 불결하고 잦은 성접촉으로 인한 생식기의 염증으로 두 차례나 입원도 했었다. 어느 날 아침 형사들이 찾아와 임XX 학생이 아르바이트하는 업소 사장에게서 성폭행당했다며 진단서를 요구했다. 심야 피자집 아르바이트 일주일만에 그 사장에게 성폭행당했다니 나는 속으로 그 사장님 아직 여중생 꽃뱀이 있는 걸 모르는 모양이라며 기분이 참 씁쓰레했다. 이 멋쟁이 바람둥이 여학생 요즘도 가끔씩 들른다. 때로는 교복을 입은 채로 진찰대를 올라간다.
넷. 아주 희귀성을 가진 30대 중반의 미인이었다. 무심코 진찰하다 깜짝 놀랐다. Double Vagina(이중질) 기형畸型이었다. 가끔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이 이중질 얘기를 꺼내면 남자들 대부분이 그 남편이 참 부럽단다. 홀짝 2부제 운행이 굳이 필요없으니 기형畸型이라도 다 나쁜 것만은 아니라며 각자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 같다.
다섯. 예전에는 자궁이 없는 여자를 빈궁마마라 불렀다. 어감이 좋지 않아 어느 때부턴가 무궁화無宮花라고 불렀다. 26세 미혼의 아가씨 근종筋腫 크기가 20cm×17cm×12cm. 수술 후 일주일째 퇴원하는 날 혹이 없어진 다행함. 자궁이 없어진 상실감. 무궁화 아가씨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운 채 돌아갔다. 일류 패션디자이너가 꿈인 아직 남자친구 하나 없는 이 아가씨 한 달 뒤 다시 들렀을 때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덩달아 한시름 놓은 그 가족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여섯. 그녀는 너무 하혈이 심했었다. 혈색소 수치가 7.0까지 떨어졌다. 정상인의 절반이다. 간곡하게 수술을 권했다. 그녀는 돌아누워 귀를 막았다. 죽었으면 죽었지 수혈은 안 받겠단다. '여호와의 증인'이란다. 달래기도 하고 겁도 주고 온갖 작전을 폈지만 실패였다. 생명이 걸린 이 순간에도 신을 믿으며 목숨을 거는 이 여자에게 의사는 그저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일곱. 레지던트 말년차 때의 이야기. 담당환자 중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40대 후반의 수더분한 아주머니 한 분이 있었다. 이 아주머니 어느 날 묻지마 관광을 다녀왔고 그로부터 한 달여 뒤 포상기태 임신에 걸렸었다. 물방울 모양의 비정상 임신이었다. 시간이 경과되면서 융모상피세포암으로 변하는 고약한 병이었다. 화학요법이 시작되면서 아내가 구토에 탈모에 갖은 고생을 겪게 되자 그 여자의 남편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밤잠을 걸러 가며 아내 병수발에 지극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한편 얄밉기도 하고 한편 딱하기도 해서 그 묻지마 관광 사건을 남편에게 꼬아바칠까 말까 하다가 결국 덮어 두었다. 사람 잡는 묻지마 관광이었다.
- 여자야, 여자야, 약해지면 안돼! / 강경주
여리고 말이 없는 여학생이었다. 주근깨가 많은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아침에 지각을 자주 하여 혼도 나고 회초리로 맞기도 했다. 네, 네, 대답은 공손히 하면서 나아지지는 않았다. 담임을 맡은 지 두 달이 지나서야 그 아이의 형편을 알게 되었다. 자식 넷을 두고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중풍에 걸린 아버지는 집에서 누워 지냈다. 친척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소녀 가장인 셈이었다. 학교에 나오는 것만도 대단했다. 소녀의 어깨에 걸린 짐이 너무 무거워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해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그 아이가 죽었다고 반 친구가 떨리는 목소리로 알려왔다. 친구들과 강에 놀러갔다가 익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스스로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라고 나는 소주를 털어넣으며 자책했다. 초라한 빈소에서 희미하게 미소 짓는 그 아이의 영정을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시인의 이야기에 나도 하나를 보탰다. 재미있게 살고 있다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누군가의 슬픔과 눈물로 나의 웃음과 행복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굴광성인 삶의 동력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필요한 일이다. 너무 웃자라기만 하면 뿌리가 튼실하지 못하다. 어쨌든 세상은 요지경이다. 희극과 비극이 버무려진 채 인간 세상은 오늘도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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