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성 교회 앞에 게시하고 그릇된 제도에 대해 토론할 것을 제의했다. 루터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결국은 가톨릭에 대한 선전포고가 되고 개신교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박문을 읽어 보면 루터가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가 와도 토론으로는 루터를 당해낼 수 없었을 것 같다. 가톨릭은 교회의 권위를 내세워 루터를 핍박할 수밖에 없었다. 반박문은 베드로 성당 건축에 관한 문제, 교황의 신적 권위, 면죄부의 해악 등을 지적한다.
다만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개혁'이라고 불러야 맞다. 젊었을 때 다녔던 교회 목사는 기독교를 종교라 부르는 것도 마땅치 않다고 했다. 기독교는 일반적인 종교 이상의 절대 진리라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이라는 말에는 서구와 기독교 세계의 오만이 들어가 있다.
루터의 반박문을 다시 보며 몇 조문을 옮긴다. 500년 전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는 면죄부는 무엇인지, 오늘의 기독교를 루터의 정신으로 되돌아본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이는 신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한다.
2. 이 말씀이 고해성사, 즉 사제에 의해 집도되는 고백과 속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3. 하지만 이것이 단지 내적 회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내적 회개는 육신의 다양한 외적 수행을 수반하지 않는 한 무가치한 것이다.
5. 교황은 자기의 권위나 교회법의 권위에 부여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벌도 가감할 수 없다.
10. 죽어서 가는 연옥을 교회법의 벌로 삼는 사제들은 무식하고 악한 자들이다.
21. 인간이 교황의 면죄부를 통해 모든 형벌을 면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면죄부 설교자들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
27. 돈이 연보궤에 짤랑 하고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으로부터 풀려난다고 말하는 이들은 단지 인간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28. 돈이 연보궤에 짤랑 하고 떨어지면 욕심과 탐욕도 분명히 증가한다. 그리고 교회의 중보 결과는 오직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
30. 누구도 자신의 회개의 완전성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 더구나 속죄의 완전성 여부는 더욱 확신할 수 없다.
32. 면죄부를 사면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맏는 이들은 그들의 교사와 더불어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다.
33. 교황의 사면을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키는 하느님의 무한한 선물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특별히 경계하여야 한다.
36.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면죄부 없이도 죄와 벌로부터 완전한 사함을 받을 수 있다.
40. 진정으로 회개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죄값을 달게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면죄부는 벌을 가볍게 하려는 것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벌받기 싫어하게 하는 것이다.
43.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꾸어주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선한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45. 궁핍한 사람을 보고도 이를 지나치며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부가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를 사는 것임을 그리스도인들은 알아야 한다.
50. 만일 교황이 면죄부 설교자들이 무엇을 강요하고 있는지 안다면 베드로 성당을 세우지 말고 차라리 그것을 불로 태워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편이 낫다. 그 성당은 지금 자기 양들의 살과 가죽과 뼈를 긁어 건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53. 면죄부 판매를 위해서 교회에서 하느님의 말씀 전파를 금하는 교황은 그리스도의 적이다.
54. 설교에서 하느님의 말씀보다 면죄부에 더 많은 시간을 할당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것이다.
62. 교회의 진정한 보물은 하느님의 영광과 은혜의 증언인 거룩한 복음이다.
76. 우리의 주장은 교황의 면죄부는 아무리 하찮은 죄라도 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86. 최고의 부자인 크라수스보다도 훨씬 부자인 교황이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돈으로 성 베드로 사원을 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87. 전적인 회개를 통해 완전한 구속과 축복을 받은 이들에게 교황은 또 무엇을 용서하고 무엇을 축복하겠다는 것인가?
95. 하늘나라는 평화에 대한 잘못된 확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많은 고난을 통해서 들어가게 된다는 확신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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