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팽나무가 쓰러지셨다 / 이재무

샌. 2018. 6. 27. 11:19

우리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 쓰러지셨다

고집스럽게 생가 지켜주던 이 입적하셨다

단 한 장의 수의, 만장, 서러운 곡哭도 없이

불로 가시고 흙으로 돌아, 가시었다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내부의 텅 빈 몸으로 보여주시던 당신

당신의 그늘 안에서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고

이웃마을 숙이를 기다렸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아이스케키 장수가 다녀갔고

방물장수가 다녀갔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부은 발들이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

우리 마을의 제일 두꺼운 그늘이 사라졌다

내 생애의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

 

- 팽나무가 쓰러지셨다 / 이재무

 

 

장마가 시작된 어제였다. 수원 영통의 500년 느티나무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불과 한 달 전에 이 나무를 찾아갔었다. 우람하고 멋진 모습에 반했는데 무슨 변고인가, 줄기가 부러진 처참한 사진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폭격을 맞은 듯 폭삭 무너져내렸다.

 

물을 머금은 나무가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부러졌다고 한다. 줄기는 속이 비어 있어 제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듯하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쉽게 가실 줄은 몰랐다. 지난달에 찍은 사진을 보니 더욱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 내부의 텅 빈 몸으로 보여주시던 당신'이라는 시 구절이 영통 느티나무에게도 그대로 들어맞는 말이다. 느티나무는 한 순간에 제 모든 걸 내려놓으셨다. 거목다운 최후다. 안타깝긴 하지만 죽음마저 아름답다. 제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를 골라 몸을 꺾으셨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영통 느티나무다. 이제 흙으로 돌아가셨으니 평안하시리라. 마지막으로 나에게 당신의 생전 모습 보여주심에 감사드린다.

 

 

지난 달(2018. 5. 30)에 만난 영통 느티나무

 

 

어제(2018. 6. 26) 쓰러지신 모습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마 / 안상학  (0) 2018.07.09
나의 유물론 / 김나영  (0) 2018.07.02
전원락(田園樂) / 왕유  (0) 2018.06.16
어디를 흔들어야 푸른 음악일까 / 문정희  (0) 2018.06.06
허수아비 / 조오현  (0) 2018.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