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랩 걸

샌. 2019. 3. 9. 10:05

이 책의 저자인 호프 자런(Hope Jahren)은 여성 식물학자다. 풀부라이트 상을 세 번이나 수상했으며, 2016년도에는 '타임'이 선정한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과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책 제목인 <랩 걸(Lab Girl)>에도 나타나 있다. 책 초반부에는 소녀 시절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놀던 추억이 아련하게 그려진다.

 

책은 뿌리와 이파리, 나무와 옹이, 꽃과 열매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식물 설명에 대응하여 자신의 과학자로서의 일생을 보여준다. 나무가 씨앗에서 떡잎을 내고 성장하고, 시련을 겪으며, 꽃 피고 열매를 맺듯이 인간의 일생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자다운 구성이다.

 

책을 읽으며 제일 놀라운 점은 저자의 뛰어난 문장력이다. 과학자가 맞아, 라는 질문이 저절로 나온다. 작가로 나섰어도 넉넉히 성공했을 것 같다. 글에는 유머, 재기, 지성이 적절하게 녹아 있어 감탄이 나온다. 과학을 전공한 분으로 이만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나도 과학을 공부했지만 과학자의 삶이 어떠한지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알게 되었다. 앞서가는 과학자에게는 고독과 열정, 그리고 창의성이 있어야 한다. 일을 사랑하는 마음과 불굴의 의지도 마찬가지다. 과학자라고 하면 깔끔한 연구실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실험하고 연구에 매진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연구비가 없으면 자신의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없다. 예산을 따내는 능력 또한 과학자가 되는 요소 중 하나다. 

 

더구나 자런은 여성 과학자다. 보수적인 과학계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 또한 만만치 않다. 책에는 여성 과학자가 감내해야 하는 서러움이 곳곳에 배어 있다. 자런은 난관을 이겨내고 정상에 우뚝 섰다. 여섯 번이나 대학을 옮기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이 책을 통해 한 여성의 삶과 사랑, 과학에 바치는 뜨거운 열정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과학자로서의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을 묘사한 부분은 감동적이다. 팽나무 씨앗으로 과거 지구 환경을 알아내는 연구를 수행하던 중에 씨앗이 오팔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가루가 오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는 이 우주에 단 한 사람, 나뿐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나, 작고 부족한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다. 나는 나만의 독특하고 별난 유전자들이 모여서 생긴 존재일 뿐 아니라 창조에 관해 내가 알게 된 그 작은 진실 덕분에, 그리고 내가 보고 이해한 그 진실 덕분에 실존적으로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해가 뜨길 기다렸다. 눈물 몇 방울이 볼을 적셨다. 내가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도 아니어서 우는 것인지, 혹은 누구의 딸도 아닌 느낌이어선지, 아니면 그래프에 나타난 그 완벽한 선 하나가 너무도 아름답고, 내가 앞으로 영원히 그 선을 가리키며 나의 오팔이라고 말할 수 있어서 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과학자로서의 보람이 어디서 오는지 잘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나도 가슴이 뛰는데 자런은 어떠했겠는가. "유레카"야말로 과학자의 진정한 기쁨이고 행복이다. 씨앗에 관한 명문장도 있다. 길어서 전부를 인용하지 못하지만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최소 1년에서 수백 년, 길게는 수천 년을 기다렸다 발아하는 씨앗도 있다. 씨앗은 어두운 땅속에서 묵묵히 때가 오길 기다린다. 우리가 땅을 딛는 발자국만한 면적에는 수백 개의 기다리는 씨앗이 있다. 대부분은 기다리다가 때를 만나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중에 아주 운 좋은 개체 하나가 자신의 꿈을 꽃 피운다. 우리는 꿈만 간직한 채 소멸해가는 씨앗도 볼 줄 알아야겠다.

 

책에는 아주 흥미로운 인물이 하나 나온다. 자런이 고용한 연구실 동료인 빌이다. 20년 넘게 함께 지내며 공동 연구를 한다. 남편보다도 비중이 더 높은 사람인데 둘의 관계가 기묘하다. 몇 달간 둘이만 있기도 하고, 같은 방에서 지내기도 하는데 친구 이상의 선은 넘지 않는 것 같다. 서로 사랑하는 것 같으면서도 남녀간의 사랑은 아니다. 빌은 자런 이상으로 과학 연구에 특화된 인물인 듯하다. 세속의 즐거움을 초월한 채 연구 과제에 파고드는 집중력이 대단하다. 자런과 빌이 결혼할 것인지 읽는 내내 궁금했는데 결과는 아니었다.

 

<랩 걸>은 자기 일을 사랑하고 몰입한 한 과학자의 감명 깊은 이야기다. 너무 워커홀릭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럼으로써 과학계의 정상에 설 수 있었을 것이다. 책은 과학자가 자연의 비밀을 알아내는 과정의 고초와 기쁨을 잔잔히 보여준다. 식물에 관한 애정과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점도 좋다. 자런은 자신을 개미에 비유하면 이 책을 마무리한다.

 

"과학은 일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또 하루가 밝고, 다음 주가 되고, 다음 달이 되는 동안 내내 일을 할 것이다. 나는 숲과 푸르른 세상 위에 빛나는 어제와 같은 밝은 태양의 따사로움을 느끼지만 마음 속 깊이에서는 내가 식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오히려 개미에 가깝다. 단 한 개의 죽은 침엽수 이파리를 하나하나 찾아서 등에 지고 숲을 건너 거대한 더미에 보태는 개미 말이다. 그 더미는 너무도 커서 내가 상상력을 아무리 펼쳐도 작은 한구서밖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다. 과학자로서 나는 정말 개미에 불과하다. 다른 개미들과 전혀 다르지 않고, 미흡하지만 보기보다 강하고, 나보다 훨씬 큰 무엇인가의 일부라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는 함께 우리의 손주들의 손주들이 경외감을 느낄 무엇인가를 건설하고 있고, 그것을 건설하는 동안 할아버지들의 할아버지들이 남긴 투박한 지식사항을 날마다 들여다본다. 과학계를 이루는 작지만 살아 있는 부품으로서 나는 어둠 속에서 홀로 앉아 수없는 밤들을 지새웠다. 내 금속 촛불을 태우면서, 그리고 아린 가슴으로 낯선 세상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오랜 세월을 탐색하며 빚어진 소중한 비밀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누구나 그렇듯 나도 누구에겐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염원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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