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물질세계에서 생기는 원인과 결과의 상호관계를 밝히는 학문이 자연과학이다. 뉴턴의 운동 법칙은 만물의 작동 원리를 설명해주는 인과 관계에 대한 깔끔한 이론이다. 만일 원인 없는 결과가 존재한다면 과학은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행위에 인과 원칙을 적용한 것이 불교의 업론(業論)이다. 선업에는 좋은 과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른다[善因樂果 惡因苦果]. 인간이 짓는 모든 생각이나 행위가 업(業)으로 남아 영향을 미친다. 업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는 것이 불교의 원리다.
그러므로 나의 삶에 대한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악업을 지어 놓고 좋은 과보를 바란다면 도둑놈 심보에 다름 아니다. 거기서 괴로움이 생겨난다. 합당한 과보를 받겠습니다, 라는 마음가짐이라면 괴로울 리가 없다. 나는 불교 가르침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어떻게 선업만 지으며 살 수 있겠는가. 정진하고 노력해야겠지만 의지와 달리 자주 어긋나는 게 인간이다. 악업의 결과를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불교는 말한다. 인생에 대한 자기 책임이면서 긍정이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생사가 없을 수 없다. 일 플러스 일이 꼭 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른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도 사실 불분명하다.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가 위중한 병으로 고통받는 상황을 우리는 안타까워한다. 우리가 세간에서 느끼고 마음이 움직이는 상황이 저 너머의 세계에서도 꼭 그대로인 것은 아닐지 모른다. 만약 좋은 과보를 받으려고 선업이라는 걸 행한다면 그런 행위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겉으로는 선업으로 보이지만, 속 내용으로는 악업이 될 수도 있다.
집단 무의식이 있듯 집단의 업이 있을 수도 있다. 가문이나 공동체가 짓는 업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은 자유로울 수 없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체제에 성실히 복무하는 것이 어쩌면 악업을 쌓는 일이 될지 모른다. 내가 착하게 산다고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업이나 인과 관계는 일차원적으로 해석할 문제가 아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런 과정에서 한 순간도 업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선택에 따른 과보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기 때문이다. 현재의 마음가짐이나 행실이 미래의 나를 만든다. 이것이 불교 인과론의 핵심이다. 따라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인간으로서 마땅한 태도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편이기도 하다.
나는 예상한다. 늙을수록 외로울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지금의 나를 보면 미래의 내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어서 불평하거나 원망해서는 안 된다. 자업자득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당부하다. "과보를 달게 받겠습니다!" 이 말 한마디는 잊지 말고 꼭 명심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