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어미의 마음

샌. 2019. 5. 12. 12:23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다. 문득 스님이 된 고향 동무가 떠오른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서로 떨어져 소식이 뜸했는데 어느 날 출가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엉뚱하면서 진지한 면이 있긴 했지만 스님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머니가 해인사에 찾아갔지만 만나주지 않아 눈물바람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젠 자식이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라는 매몰찬 대답만 전해 들었다 한다. 에미 얼굴도 안 보려는 지독한 놈이라고 돌아와서도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한다. 어머니의 마음일 것이다. 그 뒤로도 풍문으로만 아들 소식을 들었을 뿐이었다. 아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다.

 

동무와는 정말 우연히 군대에서 재회했다. 사단 사령부에 법당이 있는데 군종 사병으로 전입 온 것이다. 나는 법무부에서 졸병 노릇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 사무실과 법당과는 50m 정도 떨어졌을까, 바로 지척에서 자주 얼굴을 보며 지냈다. 불교 얘기도 많이 들었고, 법당으로 들어오는 맛있는 간식거리도 얻어먹었다. 군종사병은 내무반 생활을 하지 않았고, 바깥나들이도 자유로웠다.

 

그 뒤로 공부를 많이 해서 해외 포교를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제대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다. 가끔 생각나지만 굳이 억지로 만나고는 싶지 않았다.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나게 되겠지, 라고 생각한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승려의 치열한 정진을 생각하면 사뭇 경건해진다. 피눈물을 흘리던 어머니도 자식의 성불을 위해 두 손 모으고 기구하게 될 것이다. 마침 출가한 아들을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을 쓴 수필 한 편을 접했다. 작년에 대구매일신문 실버문학상에 당선된 작품이다. 옮겨 본다.

 

 

어미, 비나리가 되려 하다 / 김순향

 

아침만 해도 햇살이 보였다.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서니 비가 내리더니 어느새 가지산 골바람을 타고 눈이 되어 창을 흔든다. 볕이 들다가 바람과 눈이 되어 내리는 날씨는 아들의 승가대학 졸업 날짜를 받아 든 내 마음을 꼭 닮았다.

줄이 선 바지에 셔츠 곱게 다려 타이를 받쳐 매던 아들은 우리 집 대들보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친 후 중국에서, 대만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중국사를 공부한 아들은 국내 대학의 교수로 거론되고 있었고 좋은 곳에서 중매도 들어와서 어미로서의 핑크빛 꿈을 꾸고 있었다. 또한 음악을 좋아했던 녀석은 국립교향악단 패널이었고 곧잘 어미 귀에도 리시버를 꽂아주며 밤새워 클래식 음계를 오르내리게 했다.

몇 해 전, 잠시 귀국했던 큰아이가 스승과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며 상경했었다. 달포가 지났지만 연락이 없었고 휴대폰도 꺼져 있었다. 그러나 워낙 착실한 아이였고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기에 두루두루 만나서 회포를 풀고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안한 마음을 애써 잠재웠다.

그해, 땡볕이 내리쬐던 칠월 스무 날, 우편함에 꽂혀 있던 편지 한통이 우리 부부를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발신지는 잘 알려진 사찰이었다. 서너 줄을 읽던 나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팽그르르 하늘이 도는가 싶더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부모님 전상서, 오랫동안의 소망으로 많이 번민하였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하여 포교활동을 하며 좀 더 가치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룻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달려간 절에서는 아들을 보여주지 않았다. 삼대가 적선을 하여야 가문에서 중이 나온다는 말과 갖은 소리로 우리를 회유하려고 하였으나 좀 채 돌아갈 기미가 없자 아들을 데리고 왔다. 저도 마음이 편치 않은 탓인지 그 당당하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죄인인 양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그러나 집으로 가자는 말엔 완강히 거절하여 속수무책이었다. 살아오면서 이처럼 무력한 적은 없었다.

절문을 내려오며 작은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밤인데도 천 리 길을 득달같이 달려왔다. 채 눈도 붙이지 못한 녀석을 재촉하여 큰 아들을 데리러 갔다. 끌고라도 오리라는 다부진 마음으로 갔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동생도 형을 한 번은 봐야하고 부모도 한 번은 더 봐야하지 않겠냐는 가족들의 거친 항변에 겨우 종무소로 데리고 왔다. 맙소사! 하룻밤 사이에 큰 아들은 삭발을 하고 행자 승복을 입고 있었다. 작은 아들은 울부짖었다.

“부모님과 나는 형에게 도대체 무엇이냐?”
“그런 큰일에 왜 의논 한 번 없었느냐?”

죄인 닦달하듯 몰아붙이는 동생에게 한마디도 못하는 큰 녀석과 흥분을 삼키지 못하는 작은 녀석을 보는 가슴은 아리다 못해 짓이겨졌다.

대만에 있는 짐을 가져와야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책은 이미 대만대학에 기증을 했고 옷이랑 소지품은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왔다고 했다. 아까웠다. 돈만 생기면 책을 사는 녀석이기에 내가 중국에 갔을 때도, 대만에 갔을 때도 책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네 책과 집에 있는 책을 보태서 도서관을 차리자며 농을 하고 왔는데 미련 없이 훌훌 털고 온 것을 우리는 눈치 채지 못했다. 세상 무엇보다 책을 아끼던 아들이었기에 이미 가족들의 만류도 소용없음을 알았다.

절에 들어 온지 한 달 남짓인데 행자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고왔던 손이 군데군데 헤지고 습진이 돋아났다. 그 엄격한 군율도 사찰의 생활지침에서 가져왔다고 했으니 계를 받지 않은 행자승의 고초는 무슨 말로 대변하랴. 수행이란 이름으로 인내를 배우는 과정이라고 다독이며 하루를 보내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남편은 자식도 내 것이 아니라 세상에 와서 빌려 쓰는 것이라고 나를 달랬다. 내 것도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알고 살아 온 것이 죄가 되어 이리도 아프다. 돌아오는 차 속에선 쓰린 속 감춘 채 속울음만 삼키는 남편임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목 놓아 울었다.

아들의 행자 승 생활이 끝나갈 즈음 우리는 이사를 했다. 삼십 년이나 정들었던 집이다. 승복을 입은 아들을 본집에 들일 수 없어서 이사를 했지만 묵은 정을 떼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들었다. 사는 터를 옮겼어도 친척과 친구들은 큰아들의 안부를 물었다. 집안의 종손인 만큼 기대도 컸기에 그들의 궁금함은 당연한 것이어서 인도에, 또는 대만에 있다고도 했다. 아직도 출가를 했다는 말을 못하고 나는 여전히 여러 모임에 참석을 하지 않아 오해를 받기도 한다.

신새벽이면 멀기만 한 불혹의 살점 하나로 나는 명치부터 아린다. 특히 삭풍 부는 동지섣달에는 베란다에 서서 새벽 버스에 눈을 박으며 중얼거린다. 저 버스만 집어타면 늙은 햇중을 볼 수 있는데, 산중 얼음물에 마음 베이지는 않았는지, 살 에는 새벽예불에 두 귀는 무사한지, 눈도 귀도 먹먹해진 어미는 길에다 안부를 묻는다.

그 애물단지가 오랜만에 세상 집에를 왔다. 귀가한 승복을 다림질 하는 아린 모정이 회색장삼 위로 방울방울 번진다. 나는 긴 시간 챙겨주지 못한 밥상을 차린다. 채식으로 허약해졌을 속을 다스리려고 등심과 낙엽살, 제비추리도 넘치도록 굽는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대던 모습에 얼마나 흐뭇해했던 지난날인가, 그러나 줄어 든 것은 채소 반찬과 김 한 쟁반이다. 먹성도 입성도 이미 속가를 벗어나 있다. 오래 머물지도 못하고 등짝엔 바랑 가득 어미 눈물만 지고 떠난다. 시큰거리는 것은 저도 매한가진지 한 번 쯤 돌아보련만 끝내 뒤통수만 남긴다. 부모가 사력을 다해 말리던 그 길을 타고 난 제 길처럼 잘도 가지만 어미는 아직까지도 미련에 통째로 젖어 허우적댄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게 인생이다. 내가 중 어미가 되리라 상상이나 했던가? 잦아드는 햇살로 나의 삶도 한 뼘 남짓 남았을 뿐 그리 길지 않음을 안다. 이제 젖은 마음 훌훌 꺼내어 걸어본다. 바짝 말라지긴 애당 초 그른 일이지만 시나브로 꾸덕꾸덕 해질 날 기다린다. 아들의 졸업식에도 동참하여 축하해주리라. 꺼진 햇불이어도 자식은 가슴에 담아야 한다. 나는 법랍이 낮은 아들의 성불을 위해 기꺼이 비나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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