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지공거사가 되다

샌. 2019. 3. 17. 14:23

지공거사(地空居士,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65세 이상 되는 노인)가 된 지 두 달이 지났다. 학교 동기들보다 이태나 늦다. 학교를 한 해 빨리 들어간 데다, 호적마저 일 년 늦은 결과다. 그래서 제일 끄트머리로 지공거사에 편입했다.

 

아직 경로카드는 발급받지 못했다. 서울에 살지 않으니 지하철 무료 이용 카드가 그다지 소용이 없다. 다른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면 된다. 그동안 몇 번의 전시회와 시설 입장료에서 할인을 받았다. 막상 요금 할인을 받아보니재미가 쏠쏠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옛말이 있듯이 돈 앞에서는 나이 든 사실을 자랑할 만도 하다.

 

이젠 대중교통 경로석에도 떳떳하게 앉을 수 있다. 전에도 날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머리가 백발이라 나를 칠십대로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이가 들어보이면 편할 때도 있다. 한참 전부터 날 보고는 "그냥 들어가십시요"라고 하는 매표소 직원이 다수였다. 그러나 워낙 고지식하니 입장료는 꼬박꼬박 냈다.

 

이제는 법률이 정한 공식적인 노인이 되었다. 그래선지 노인이 된 첫해부터 통과의례를 겪는 것 같다. 몸 이곳저곳이 아프면서 노인이 된 걸 실감한다. 정신적으로도 기세가 꺾여간다. 지공거사가 되면서 한꺼번에 확 늙어가는 느낌이다.

 

65세가 노인 대우를 받을 나이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70세로 상향 조정하자는 의견도 많다. 그러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용기가 정부한테는 없는 것 같다. 선거 때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하철 무임승차를 비롯한 노인 혜택을 70세로 올리는 데 찬성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공식적인 노인이 5년 유예되는 셈이다. 왠지 5년을 공짜로 번 것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노인 빈곤 문제가 심각하다. 복지 차원에서 넓게 생각한다면, 존재하는 혜택을 굳이 축소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안 아프면 산다." 어머니가 자주 하시는 말씀이다. 전에는 건성으로 들었는데, 이제는 그냥 흘려버릴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열정은 소진되고, 욕심은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는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 몸 아프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게 복이 아니겠는가.

 

김형석 선생은 60세에서 75세 사이를 인생의 황금기라고 말한다. 그때가 되어야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며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60대는 일과 의무에서 해방된 자유가 있는 대신, 육체와 정신의 쇠락을 맛보기 시작하는 나이다. 의욕이 있어도 할 수 없는 일이 많고, 의욕마저 점차 사그라진다. 또한, 노인의 의식에는 남은 생이 길지 않다는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노인이 된다는 건 인생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이가 들고 세월이 쌓이면 속이 알차고 깊어져야 한다. 이것이 연륜(年輪)이다. 그러나 세월 흐름이 곧 성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야마다 레이지는 <어른의 의무>에서 노인이 되어 지켜야 할 세 가지를 이렇게 말한다. 첫째, 불평하지 않는다. 둘째, 잘난 척하지 않는다. 셋째,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한다. 누구나 지공거사가 되지만, 아무나 품위 있게 늙어가지는 못한다. 인간의 품격을 지키며 나이 들어가는 일, 이것이 내 노년에 대해 기대하는 유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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