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며 주유천하를 한 공자는 68세가 되어 노나라에 돌아왔다. 아무 소득이 없는 빈손 귀국이었다. 이때부터는 직접 정치하기를 포기하고 대신 제자를 기르는 일에 전념했다. 나이 73세(BC 479년)에 세상을 뜰 때까지의 5년이 공자 생애에서 가장 여유 있고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논어> 처음에 공자의 이런 말씀이 나온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배우는 족족 내 것을 만들면 기쁘지 않을까? 벗들이 먼 데서 찾아와 주면 반갑지 않을까? 남들이 몰라주더라도 부루퉁하지 않는다면 참된 인간이 아닐까?"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온 不亦君子乎
어쩌면 <논어> 사상을 압축한 듯한 이 말씀은 공자 생애의 말기, 즉 마지막 5년의 어느 때쯤에 하신 듯하다.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세상을 달관한 여유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자라도 폭풍의 장년기나 주유천하 시기에 나올 법하지 않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원숙한 인격에서 토해질 수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내 자신에 적용해 본다. 첫 번째의 '학이시습(學而時習)'은 반쪽짜리다. 배우는 데는 관심이 있지만 이걸 내 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핵심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껍질에서만 배회할 뿐이다. 온전한 배움의 기쁨이 아니다. 세 번째는 '군자의 마음'인데, 군자를 설명하면서 공자는 참 쉬운 말을 썼다. "남이 몰라줘도 부루퉁하지 않는다." 사람의 정서적 욕구 중에 '인정욕' 만큼 뿌리 깊은 것도 없다. 사람의 온갖 행동은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충동에서 나온다. 어린아이를 보면 거의 100%다. 어른이 된다는 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고 홀로 서는 것이다. 군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괴롭지 않다. 나에게 '군자의 마음'은 언감생심이다.
그나마 위안을 받는 게 두 번째의 '먼 데서 찾아온 벗'이다. "벗들이 먼 데서 찾아와 주면 반갑지 않을까?[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그렇다고 나한테 먼 데서 찾아와 주는 '사람' 벗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여기에 살고 있는 8년 동안 찾아와 준 사람은 전혀 없었다. 불현듯 나타나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반가운 사람, 그런 사람이 있는지나 의문이다.
나는 여기서 벗을 내 식대로 해석한다. '사람' 벗이 아니라 '책' 벗이다. 책을 읽으면 벗을 만나고 벗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다. 책의 저자가 앞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읽으면 '사람' 벗과 다를 바가 없다. 이야기의 수준이나 내용은 내가 아는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다. 유명한 사상가나 작가를 내 옆에 앉힐 수 있다. 이보다 저 좋은 벗이 어디 있겠는가.
'책' 벗은 국내만 아니라 먼 외국에서도 찾아온다. 일본, 미국, 더 멀리는 아프리카에서도 찾아와 나에게 얘기를 건넨다. 서로 대화도 가능하다. 그의 말에 유심히 귀 기울이면 내 질문에 그가 어떤 대답을 할지도 알 수 있다. '사람' 벗이면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출 일도 생긴다. 그러나 '책' 벗은 그럴 염려가 없으니 아주 마음이 편하다.
'책' 벗은 이제는 이 지상에 없는 사람과도 만날 수 있다. 내가 <논어>를 읽으면 공자님과 만나는 것이다. 인류 최고의 스승과 대면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소크라테스도 만날 수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도 들을 수 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벗들이 먼 데서 찾아와 주면 반갑지 않을까?" 반갑고 말고다.
나에게 있어,
"책은 먼 데서 찾아온 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