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 연휴 중 SBS TV에서 '요한, 씨돌, 용현'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요한과 씨돌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김용현 선생의 삶을 소개하는 감동적인 내용이었다.
젊은 시절의 요한은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와의 만남을 계기로 요한은 독재 타도의 시위 현장에서 앞장을 섰다. 그의 활동 중 하나가 1987년에 군 복무 중 의문사한 사병의 억울한 죽음을 고발한 일이다. 군에서는 훈련을 받다가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사실은 부재자 투표에서 야당 후보에게 표를 행사했다고 구타를 당해 숨진 것이다. 요한은 사병의 가족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에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요한이 주장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요한은 사라졌다.
요한은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씨돌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주의의 삶을 살았다. 자연주의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세 시간이나 걸리는 정선 읍내까지도 지게를 지고 걸어서 다녔다. 7년 전에 '세상에 이런 일이'에 소개되어 화제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이웃의 회고담에 의하면 겨울에는 사냥꾼들이 고라니를 못 잡게 하기 위해 눈밭에 찍힌 고라니 발자국을 지우고 다녔다 한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났을 때는 강원도에서 달려와 자원봉사자로 인명 구조에 힘쓰기도 했다.
제 한 몸 돌보지 않고 요한과 씨돌로 살아가던 김용현 씨는 뇌출혈로 산에서 쓰러졌다. 등산객이 발견하여 병원으로 옮겼지만 반신마비가 되었고 언어장애가 생겼다. 세상의 정의를 위해,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며 싸운 사람의 생의 보답으로는 너무 의외이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방송의 끝에서 담당 PD가 "정작 본인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고 도움이 되지도 않았는데, 왜 그런 삶을 살았나?"라고 묻자 그는 구불구불한 글씨의 필담으로 대답했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 이 말이 가슴을 묵직하게 내리누른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은 사람이 살아가는 염치에 관한 일이다. 자신의 철학이나 신념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말을 하기는 쉽지만 몸으로 살기는 어렵다. 젊은 시절에 사회 변혁을 꿈꾸며 활동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기존 체제에 흡수되어 기득권층으로 변하고 단맛을 즐긴다. 최근의 시끄러운 정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김용현 씨 같은 사람은 자연에 묻혀 이름 없이 살아간다. 자식이 특목고에 갈 실력이 됨에도 불구하고 대안학교에 보내면서 시골살이를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선택의 문제지만, 누가 존경받을 사람인지는 물을 필요가 없다.
세상의 희망은 김용현 선생 같은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육체는 병으로 쓰러졌지만 정신은 살아 있다. 그 정신이야말로 세상의 구원이 된다. 선생은 강원도에 살 때 많은 글을 썼다. 이번에 <그대 풀잎 비비는 소리 들었는가>라는 세 번째 책이 나왔다. 앞에 나온 책은 <오! 도라지꽃> <청숫잔 맑은 물에>다. 선생의 건강이 회복되길 기원하며, 책을 통해 선생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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