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아, 달다!

샌. 2019. 8. 12. 11:30

나그네가 불타는 광야를 걷고 있을 때였다.

홀연 미친 코끼리 한 마리가 나타나 나그네에게 덤벼들었다.

마침 주위에는 입구에 큰 나무 한 그루가 거인처럼 가지를 벌리고 서 있는 우물이 있고, 우물 안으로 나무에 얽힌 칡덩굴이 내려뜨려져 있었다.

나그네는 급한 김에 칡덩굴을 타고 내려가 우물 안을 피신처로 삼았다.

하지만 우물 안도 살벌하긴 마찬가지였다.

우물 안쪽 벽에는 이무기 네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고 우물 아래에는 독룡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더욱이 나그네가 매달려 있는 칡덩굴을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가 덤벼들어 갉아댔다.

이런 절박한 순간, 나무 위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나그네는 칡덩굴에 매달린 채 꿀맛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 맛이 어찌나 달던지 모든 고통을 잠시 잊을 판인데, 화상은 말한다.

"자, 당신이 이같이 죽음을 목전에 둔 당사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중생이 즐거워하며 대답하기를,

"아, 달다!"

 

이 불교 우화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서였다. 칡덩굴과 검은 쥐, 흰 쥐를 설명하던 윤리 선생님의 표정까지 생생하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이 우화가 가리키는 내용을 얼마나 절실히 받아들였을지는 의문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은 틀림없다.

 

이 예화는 인간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죽음이라는 어두운 심연이 바로 옆에 있는데 몇 방울 에 취해 "아, 달다!"라고 만족하는 모습은 얼마나 가련한가. 눈만 뜨면 정확한 현실이 보이지만 외면한다. 상황을 직시하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불교의 화택(火宅) 예화도 비슷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불난 집으로 묘사하고, 인생이란 불난 집에서 불이 난 줄도 모르고 노는 아이와 같다. 중요한 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밖으로 뛰쳐나오는 일이다. 그러나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에게 객관적 사태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우물 안 중생이 단맛에 취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상황을 직시하는 것이 깨달음이고,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 아닐까. 우물 안 중생이 단맛에 취해서 밖으로 나올 생각을 못 한다. 오히려 옆 사람 입에 더 많은 꿀이 들어간다고 질투하며 싸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용기 있게 밖으로 나온다. 코끼리는 이미 사라졌고 - 아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 그의 눈앞에는 드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불교가 세상과 인간을 보는 관점을 이 우물 우화는 잘 보여준다. "자, 당신이 이같이 죽음을 목전에 둔 당사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중생은 눈을 감고 꿀맛에 만족하며 그저 칡덩굴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아, 달다!" 우리가 지상에서 누리는 쾌락이 - 행복조차도 - 범주 안에 들어간다면 작금에 유행하는 행복론의 한계가 분명해진다. 여기에는 유명 스님이 설파하는 행복론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괴로움의 근원적인 단절이었다. 적당한 현실 타협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아, 달다!"라는 말이 주는 의미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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