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스쿨서점의 추억

샌. 2019. 12. 11. 11:35

어머니가 백내장 수술을 받으셨다. 마침 고향에 간 길에 어머니를 모시고 영주 시내에 있는 병원에 들렀다. 언제 봐도 지방 병원과 약국은 노인들로 만원이다. 어머니는 항상 말씀하신다. "병원과 약국은 늙은이가 먹여 살린다." 이번에도 두 시간 넘게 기다려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대기 시간을 이용해서 나는 영주 시내를 산책했다.

시내에 나가면 꼭 들러보는 곳이 있다. 스쿨서점이다. 간판에도 'Since 1954'라 적혀 있는데, 아무튼 무척 오래된 서점이다. 내가 초등과 중학교에 다닐 때 참고서는 이 서점에서 샀다. 50년도 더 된 옛날이다. 그때는 스쿨서점이 영주 시내에서 거의 유일한 서점이었고, 위치는 지금의 맞은편에 있었다.

스쿨서점에는 떠올리기 싫은 추억이 있다. 아마 초등학교 6학년 때였을 것이다. 서점에 들어갔다가 너무 가지고 싶은 책을 한 권 보았다. 이윤복 어린이가 쓴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당시에 화제가 된 책이었다. 책은 갖고 싶은데 돈은 모자랐다. 몇 번을 만지작거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무슨 심보였는지 책을 옷 속에 숨기고 모른 척 나오다가 주인에게 들켜 버렸다. 졸지에 책 도둑놈이 된 것이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지만 왜 그런 행동거지를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납득이 안 된다. 부모님은 공부하는 데 드는 돈이라면 빚을 내서라도 마련해 주셨다. 책을 사야겠다고 해서 돈을 받아 다음날 사면 됐다. 그렇다고 도벽이 있는 아이도 아니었다. 소년기의 즉흥적인 충동은 무슨 일이라도 벌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곧 바로 무슨 과보를 받을지 판단하는 능력이 모자랐는지 모른다.

그때 서점 주인에게 눈물 콧물 빠지게 혼쭐이 난 건 물론이다. 그리고 서점 앞 길거리에서 한 시간은 손을 들고 서 있었을 것이다. 소심하고 얌전하기만 한 아이에게는 너무나 창피하고 황당한 일이었다. 평생을 남의 것에 손을 댄 건 그때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그 와중에도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연락할까 봐 제일 무서웠다. 다행히 서점 주인은 영화 '벌새'의 가게 주인 같지는 않았다.

그때의 따가운 경험이 아이들의 절도에 대해서는 관대한 마음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학교 현장에 있다 보면 분실 사건이 수시로 일어난다. 누가 그랬는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밝혀지더라도 좋은 말로 타일렀지 벌을 가하지는 않았다. 옛날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동하면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리고 벌보다는 용서가 사람을 더 감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쿨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다. 쓴 기억은 잠깐이고 추억은 달콤하다. 나는 서점에서 책의 향기를 맡으며 십대의 어린 학생이 된다. 이번에는 정현종 시인의 시집 <견딜 수 없네>를 샀다. 물론 당당하게 카드를 내밀었다.

영주는 특이하다. 시내 중심부에 서점이 넷이나 있다. 스쿨서점, 세종서적, 대한서림, 기독교서적이다. 반경 50m 안에 모여 있는데, 대형 서점으로 매장도 넓다. 좁은 동네에서 장사가 될까 싶은 걱정이 든다. 매장 아주머니에게 "영주에는 책 읽는 사람이 많은가 보지요"라고 물으니 말은 없고 어색한 웃음만 흘린다. 어쨌든 고맙고 대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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