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내 사랑 백석

샌. 2020. 2. 7. 12:45

1938년, 청진동 시절이었다. 백석과 자야는 아침부터 독서에 골몰하느라 해저무는 줄도 몰랐다. 이때 자야의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는 약초(若草)극장에 영화 '클레오파트라'가 왔는데, 함께 가자고 졸랐다. 자야는 가고 싶었으나 백석이 안 갈 것 같아 친구에게 눈짓을 했다. 눈치 빠른 친구가,

"백선생! '클레오파트라' 보러 같이 가자구요!"

라고 보챘다.

백석은 대답 없이 잠자코 있더니, 곧바로 자야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클레오파트라, 여기 있지 않소?"

 

<내 사랑 백석>에 나오는 일화다. 자야가 백석과의 사랑을 회상하며 쓴 이 책을 읽어보니 둘은 상상한 것보다 더 간절하고 열렬하게 사랑한 것 같다. 요사이 말로 하면 닭살 돋는 연인이었다.

 

백석과 자야가 처음 만난 건 1936년 함흥에서였다. 백석은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의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감옥에 갇힌 스승의 뒷바라지를 위해 일본에서 귀국해 함흥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기생이었던 자야는 함흥권번에 소속이 되어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에 나가고 있었다. 마침 영생고보 선생들 모임이 함흥관에서 있었는데, 이때 한 자리에 있었던 백석과 자야는 첫눈에 서로 반해 버렸다.

 

백석은 자야를 옆에 앉히고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대뜸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멋쟁이 시인인 백석과 재기 넘치는 자야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백석의 다짐과 달리 둘이 함께 산 기간은 3년 정도에 불과했다. 백석이 만주로 떠나면서 헤어진 뒤, 남북 분단이 되면서 영원한 이별로 이어졌다.

 

기생과의 사랑을 백석의 전통적인 집안에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에 중매결혼을 세 번이나 강제로 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백석은 신부에게 손 한 번 대지 않고 자야에게로 도망쳤다. 자야 또한 백석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 같아 번민이 깊었다. 상해로 도피하며 자살 결심까지 했다. 나중에 백석이 집안의 압력을 피해 만주로 피신할 때 자야는 따라가지 않았다. 그것이 설마 마지막이 될 줄은 추호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

 

<내 사랑 백석>은 자야가 직접 쓴 백석과의 사랑에 대한 회고록이다. '일순간에 시작된 사랑, 일평생에 걸친 그리움'이라는 말이 두 사람의 슬픈 인연을 잘 말해준다. 자야는 죽을 때까지 백석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번 자야는 법정 스님에게 시가 천억 대의 길상사 부지를 시주했다. 그런 저간의 사연도 들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책에는 젊은 시절 백석과의 사랑 이야기만 가득하다.

 

자야는 백석의 생일날에는 하루 온종일 곡기를 끊고 단식을 했다.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고 경건하게 반성과 참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본인의 생일날도 마찬가지였다니 자야의 지중한 심중을 헤아려볼 수 있다. 어쩌면 백석보다 자야라는 여인이 더 대단해 보인다.

 

1999년 향년 84세로 숨을 거두기 전 자야는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느냐"는 지인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천억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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