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작가의 감성 충만한 여행기다. 여행지와 작가의 교감이 글과 사진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책을 펼칠 때마다 카메라 하나 들고 혼자서 계획 없이 떠돌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낯선 도시 뒷골목에 허름한 숙소를 정하고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싶다. 며칠 빈둥거려도 좋겠다.
이런 여행에 대한 로망 하나 나에게도 있다. '포카라에서 열흘'을 꿈꾼 게 십 년이 넘었지만 유효기간은 아직 남아 있다. 반으로 평가절하된 네팔 화폐도 여전히 내 지갑 속에서 제 땅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언젠가는 오겠지.
작가의 글 한 편을 옮긴다.
좋아해
낡은 옷을 싸들고 여행을 가서 그 옷을 마지막인 듯 입고 다니는 걸 좋아해. 한 번만 더 입고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면서 계속 빨고 있는 나와 그 빨래가 마르는 것, 그리고 그렇게 마른 옷을 입을 때 구멍 하나 둘쯤 더 확인하거나 특히 입을 때 삭을 대로 삭은 천이 스르르 찢어지는 그 소리를 좋아해.
기차역이나 기차 안에서 만난 사람들을 기차가 떠남으로 해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인연을 좋아해. 그 당장은 싫고 쓸쓸하지만 그 쓸쓸함이 여행에 스며드는 걸 좋아해.
옆방에 장기투숙하는 사람들을 사귄 다음, 그들에게서 소금과 기름을 꾸는 걸 좋아해. 몇 번 귀찮게 하다가 결국엔 내가 만든 요리 아닌 요리를 그들에게 한 접시쯤 건네게 되는 상황까지도.
마을 사람들에게 내가 여행자가 아니라 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오래 머문다 싶은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들은 나에게 자전거를 내주고 나는 그들에게 가져온 동전 몇 개를 나눠주고, 그러면 그들은 나에게 맥주 한 잔을 권하고 그렇게 해가 기울고 혼자 돌아가는 것이 싫어 그들이 떠난 자리에서 펴놓은 수첩 가득 그들과 주고받은 대화의 흔적들을 들여다보는 것도.
사진 찍는다고 버스 뒷자리에 앉아 있는 나를 위해 애써 운전석 옆 앞자리에 앉혀주던 기사가 버스를 세우더니 흙탕물 튀긴 버스 유리창을 자신의 옷으로 닦아주는 것도, 산사태가 난 길 위에서 버스를 밀어야 한느 상황에서도 옷 버린다며 나를 제외시켜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자기가 듣는 좋은 음악이라고 음악 테이프를 갈아주며 내 표정을 살피는 기사와 서른 시간이 넘는 여정 동안 기내식처럼 식사를 차려 손님에게 나눠주던 남자 버스 안내원이 때 낀 손톱을 파내다가, 하품까지 섞어가며 갈 길은 멀지만 그래도 많이 왔다고 말하는 것도 좋아.
기약 없이 떠나왔으니 조금 막막한 것도, 하루하루의 시간이 피 마르듯 아깝게 느껴지는 것도, 돈이 다 떨어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당신이 내 국제전화를 받지 않는 것도, 겨우 연결된 국제전화인데 내가 뭐라고 말할 때마다 '됐어'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도 모두 나쁘지 않아.
혼자 이국의 바닷가에서 울적해하기보다는 웃을 수 있는 일을 먼저 생각하자고 쓸쓸히 마음을 먹는 일도, 떠나는 일은 점퍼의 지퍼 같은 것이어서 지퍼를 채우기만 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도 좋아해. 그리고 눈이 내리고 내리고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이는 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는 '당신하고 같이 왔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면서 술이나 사러 나갈까 하며 벗어놓은 양말을 신는 걸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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