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에 인도에서 중국에 온 달마대사는 선(禪)의 시조로 꼽힌다. 달마에서 전해진 선의 불꽃은 육조 혜능에 이르러 활짝 타오르게 된다.
달마대사는 온종일 침묵을 지키며 벽만 바라보고 참선을 했다고 해서 면벽바라문(面璧婆羅門)이라 불리웠다. 그만큼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정진 수도했다는 뜻이리라. 달마대사가 썼다고 전해지는 글이 '이입사행론(理入四行論)'이다.
도에 이르는 길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하며, '지성에 의한 길'[理]과 '행위에 의한 길'[行]로 구분한다. 지성에 의한 길은 경전 공부를 통한 깨달음이고, 행위에 의한 길은 삶의 실천을 통한 깨달음이다. 마치 돈오와 점수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뒷날 선사들은 도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리라. 사실 이 글에서는 선의 정신이 보이지는 않는다. 대신 다듬지 않는 다이아몬드 원석 같은 느낌이 든다. 초기 불교 가르침의 정수가 들어 있는 것 같다. 행위에 의한 길에서는 <바가바드 기타>의 분위기도 느껴진다. 불교와 힌두교 사상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경전에 의한 깨달음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지성을 부정하지 않아서 좋다. 뒷날의 선은 지성 파괴적인 경향이 있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는 오해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그리고 지(知)와 행(行)의 조화는 종교가 아니더라도 인간 삶의 기본이 되는 축이 아니겠는가. 근본적인 면에서 달마의 이 가르침은 소중하다 아니 할 수 없다.
<선의 황금시대>에 실린 글을 옮긴다.
도(道)에 이르는 두 가지 길[理入四行論]
도(道)에 이르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근본적으로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지성에 의한 길'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에 의한 길'이다.
'지성에 의한 길'이란 경전 공부를 통한 근본 교리의 이해, 즉 세상 만 가지 사물이 모두 다 하나의 참된 본질, 참본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도에 들어가는 걸 말한다. 이 참본성이 자신을 밝히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바깥 대상에 대한 관념이나 헛된 사념으로 가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짓을 버리고 참으로 돌아와 마음을 맑게 하면 그대는 애초에 '나'라는 것도 '남'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성스러운 것과 하찮은 것이 한 물건임을 깨닫는다. 그대가 이를 굳게 믿고 빗나가지 않으면 그대는 마침내 지성 자체와 은밀히 사귀고 생각이 차별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다시는 절대로 말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때 그대는 충만한 고요 속에서 무위(無爲)를 누리어 '도'와 하나가 된다. 이것을 '지성에 의한 입문'이라고 부른다.
한편 '행위에 의한 입문'엔 다음 네 가지 길이 있는데 다른 모든 길이 대부분 여기에 포함된다.
1. 미움을 넘어서는 길
구도자가 만일 어떤 고통과 시련을 당하게 되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지나간 억겁의 숱한 세월 동안 나는 근본적인 것을 외면하고 거죽에 드러나는 것만을 좇아다녔다. 인생이라는 바다의 만경창파에 흔들리며 숱한 미움과 악의를 품고 악행들을 저질러왔다. 따라서 내가 받는 현재의 고통은 비록 이생에서의 내 죄가 없다 해도 지나간 여러 전생에서 지은 죄의 업보이고 그 업보가 이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러니 그건 신이나 다른 어떤 인간이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게 아니다. 그들한테는 아무 책임도 없다. 그러므로 다른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내 스스로 불러들인 이 쓴 열매를 달게 받아들이자.'
고통스런 일을 당해도 마음이 동요되지 말라고 경전은 가르친다. 우리 마음 안에는 모든 고통의 진정한 원인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통찰력이 온전히 발휘되면 마음은 저절로 지성의 지시에 따른다. 그리하여 마음은 더 나아가 타인의 미움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구도 정진하는 좋은 기회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이 길이 바로 '미움을 넘어서는 길'이다.
2. 삶에 적응하는 길
우리는 먼저 일체 중생이 다 업보의 상호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겐 본래 '나'라는 게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일체의 고락은 외적인 인연의 산물이며, 영광되거나 욕되거나 화를 당하거나 복을 받거나 간에 모두가 전생에 행한 결과이다. 따라서 업의 저울질이 끝나면 자신이 받은 재산이나 명예 그리고 다른 좋은 것들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한때 그런 걸 얻었다고 신나해 할 까닭이 어디 있는가? 따라서 삶에서 일어나는 그때그때의 조건과 형편에 따라 얻음과 잃음이 자연적으로 자신을 거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둘 일이다. 왜냐하면 마음 그 자체에는 얻는 게 있다고 해서 늘어날 것도, 잃는다 해서 줄어들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자기 도취의 환상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마음 장난에 놀아나지 않기 때문에 그대의 마음은 '도'의 큰 흐름과 은밀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수없이 변하는 삶의 여러 형편과 상황들에 적응한느 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다.
3. 집착을 버리는 길
세상 사람들은 평생동안 어리석음에 빠져 있고 탐욕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다. 여기에서 '집착'이 생긴다. 그러나 현명한 자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진리를 이해하며 지성을 갖고 세속의 길에 물들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의 평화를 즐기며 세속으로부터 초연해 있다. 그들은 재물의 부귀 변천에 몸을 맡기면서도 한편으론 탐낼 것도 즐길 것도 없는 현상계의 텅 빔을 항상 의식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빛과 그늘처럼 상관관계에 있다. 번뇌로 들끓는 속세에 오래 머무는 것은 마치 뜨거운 솥뚜껑 위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헤매는 개미와 같다. 육신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고통을 겪으며 평화로부터 단절된다. 현명한 자는 이 점을 깊이 깨달았기에 마음이 욕망과 탐욕에서 해방되어 현상계의 여러 현상으로부터 초연해 있다. 경전에도 있듯이, "온갖 고뇌는 집착에서 생기며, 바로 이 집착을 놓는 데서 진정한 기쁨이 찾아진다(有求皆苦 無求乃樂)." 따라서 더 이상 찾지 않고 구하지 않는 데서 생기는 축복을 아는 것이 참으로 '도'의 길에 접어드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집착을 버리는 길'이다.
4. 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길
불법의 본질은 더없이 순수한 지성이다. 이 순수한 지성은 모든 형상 속에 깃든 무형의 형상을 말한다. 이 순수한 지성은 밝고 순결하며 물들지 않고 모든 집착을 떠나 있으며 '나'라든가 '남'이라든가 하는 구별이 없다. 경전에도 있듯이, "불법에는 중생이 없나니 이는 중생의 허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오, 또한 불법에는 '나' 중심의 에고가 없나니 이것은 '나' 중심의 허물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이치를 바로 보고 불법과 조화된 삶을 살아간다.
지혜로운 자는 자선 행위, 즉 자비를 위해 언제나 자기의 신체와 생명과 재산을 너그럽고 관대하게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모든 존재 자체와 생명체들의 본질이 '공(空)'임을 철저히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기대지 않는다. 일체 중생을 인도하는 가운데서도 그의 유일한 동기는 더러움을 씻어내는 데에 있다. 지혜로운 자는 중생으로서 중생 가운데 살기 때문에 소유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몸가짐을 철저히 하며 동시에 남에게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이치를 장엄하게 드러낸다. 지혜로운 자는 망상을 떨치기 위해 여섯 가지의 덕 - 남을 돕고, 계율을 지키고, 욕됨을 참고, 정신을 더욱 깊이 가져가고, 선(禪)이 무르녹은 생활을 하고, 지혜를 닦음 - 을 행하나 대단치 않은 일을 행하는 것처럼 여긴다. 이것이 바로 '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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