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수컷은 나이 들고 힘이 떨어지면 쓸모가 없어진다. 생식 기능이 없고, 사냥도 못 하고, 무리를 지켜주지도 못한다면 수컷의 가치를 어디서 찾겠는가. 반면에 보살핌과 살림이 역할인 암컷은 늙어서도 효용가치가 남아 있다. 최소한 음식을 장만하고 손주를 봐줄 수는 있다. 그래서 암컷의 평균수명이 수컷보다 긴 것은 자연선택적으로 충분히 납득이 된다. 인간만 아니라 다른 동물도 대부분 암컷의 수명이 수컷보다 20% 정도 길다.
백수의 왕자라는 사자의 세계에서 늙은 수사자는 천덕꾸러기다. 힘에 부쳐서 젊은 수사자에게 패하면 무리에서 쫓겨나고 광야를 헤매다가 죽는다. 그나마 암사자가 사냥해 오는 먹이를 받아먹다가 졸지에 혼자가 되면 제 먹이조차 구하지 못한다. 무리의 생존에 방해가 되는 늙은 수사자는 가차 없이 추방된다. 자연계의 냉혹한 법칙이다.
인간 세상에서 경제적 능력이 없는 은퇴한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부원병(夫源病)'이라는 생소한 병명이 있다고 한다. 명칭 그대로 '(퇴직한) 남편이 원인이 되어 아내에게 생기는 병'이다. 직장에서 퇴직한 남편이 집안에 있으면서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말이나 행동 때문에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아 생기는 병이 부원병이다. 두통이나 현기증, 불면증, 귀울림 등의 이상 증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장수사회가 되면서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게 생겼다.
요즈음 은퇴한 남자들이 요리도 배우고 손주를 돌보는 데 적극적인 건 다 이유가 있다. 나름대로 생존하기 위한 절박한 반응이다. 그럴 적극성이 없다면 아내 눈앞에서 사라져주는 게 예의다. 직장에 다니듯 아침 먹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면 된다. 이러자면 지갑이 두둑해야 한다. 친구나 후배에게 지갑을 자주 열어야 환영을 받지, 그렇지 않으면 금방 눈치가 보일 것이다. 이래저래 늙은 남자는 서럽다.
남자의 생애와 관련하여 인도 힌두교에서 배울 바가 있다. 힌두교에서는 사람(구체적으로는 남자)의 일생을 4단계로 나눈다. 태어나서 25세까지는 학습기(學習期)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공부를 하는 기간이다. 26세에서 50세까지는 가주기(家住期)다.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기르며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기간이다. 51세에서 75세까지는 임서기(林棲期)다. 자신의 의무를 다한 후 집을 떠나 숲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명상과 수행을 하며 은거한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거창한 뜻도 있지만, 가정에 짐이 되는 남자의 현실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 힌두교에서는 종교적으로 예쁘게 포장했을 뿐이 아니겠는가. 76세부터는 유랑기(流浪期)다. 이때부터는 가족과 공동체에서 완전히 절연되어 거지처럼 유랑하며 살다가 길 위에서 죽는다.
문화 배경이 다르지만 임서기의 현대적 의미에 대해서 숙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남자든 여자든 은퇴는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경험이다. 기존의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 잊었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어야 한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근본적인 성찰을 할 수 있는, 아니 해야 하는 시기다. 그것이 현대적 의미의 임서기라고 생각한다.
힌두교인처럼 꼭 숲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기존 사고의 울타리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장소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장자> 응제왕(應帝王) 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열자(列子)는 밖으로 나가는 대신 도리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3년간 두문불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三年不出 爲其妻爨 食豕如食人 於事无與親
3년 동안 밖에 나가지 않고,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치기를 사람 먹이듯 하여, 일에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어졌다.
제 성질이 펄펄 살아있으면 집안에 있든 밖에 있든 갈등의 소지는 여전하다. 물리적인 밖은 문제를 잠시 피하기만 할 뿐이다. 열자처럼 낮아지고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버리는 경지까지 이르러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은퇴, 즉 수컷의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은 수컷에게는 축복이 될지 모른다. 새로운 삶으로 방향을 바꾸는 충격요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컷의 노년은 이런 임서기의 의미를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드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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