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소의 무심

샌. 2020. 9. 3. 11:54

지난달에는 긴 장마와 폭우로 비 피해가 컸다. 그때 떠내려간 소가 20일 만에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며칠 전에 있었다. 뒷산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 올라가 보니 멀리 합천에서 기르던 소였다고 한다. 어떤 소는 1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바다 가운데 무인도에서 찾아낸 소도 있었다.

 

소는 몸 구조상 부력이 커서 물에 잘 뜬다고 한다. 그리고 성질이 공격적이지 않아 물살에 순응하며 떠내려가기 때문에 오래 생존할 수 있는 반면, 말은 물살을 거슬려 오르려 발버둥치다가 힘이 빠져 빨리 죽는다고 전문가는 말한다. 제 성질을 못 이겨 수명을 재촉한다. 소의 생존 비결에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운다.

 

어릴 때 시골에서는 집집마다 소를 한 마리씩 키웠다. 농기계가 없던 때라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소의 힘이 필요했다. 농토가 없는 집도 송아지 한 마리 정도는 길렀다. 가난한 집에서 소는 제일 큰 재산이었다. 잘 키워서 팔면 아이들 학비 정도는 보탤 수 있었다. 한때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불렀는데, 실제로 농촌에서는 소를 팔아 자식 학비를 충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그렇게 팔려나간 소의 뼈를 모은다면 거대한 탑이 되었으리라.

 

농사를 많이 짓던 우리 집에는 힘센 황소가 늘 있었다. 어린 나로서는 가까이 다가가기가 무서울 정도로 덩치가 컸다. 다른 동무들은 학교가 끝나면 송아지를 데리고 나와 풀을 뜯게 하는 게 일과였다. 우리 집에도 송아지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내 소원은 내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외양간이 있었다. 오른쪽에는 소죽을 끓이는 아궁이가 있어서 저녁이면 구수한 냄새가 집안을 감쌌다. 소죽을 끓이자면 작두로 마른 짚을 썰어야 했다. 가마솥에 여물을 가득 채워 등겨를 뿌리고 부엌에서 모아둔 뒷물을 붓고 불을 땠다. 사람은 굶어도 소는 먹여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비록 일은 뼈 빠지게 부렸지만.

 

가까이하기 어려운 우리 집 황소였지만 순한 눈망울만은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들에서 돌아온 소를 보면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줄기가 항상 아래로 생겨 있었다. 어린 마음에는 그게 너무 안타까웠다. 그러하지만 힘들다거나 원망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초월한 소의 무심(無心)을 그때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소는 보살이다. '나'가 없어진 존재가 보살이 아니겠는가. 소는 모든 걸 내어줄 뿐 제 이득을 취하지 않는다. 소는 삶과 죽음마저 초월해 있다. 어느 한쪽에 집착하여 안달하지 않는다. 장마에 떠내려간 소를 구하는 영상을 봐도 알 수 있다. 살아났다고 환호작약하지 않는다. 집에 돌아가도 그저 무덤덤하다. 소의 눈은 무심하여 호수처럼 깊다. 자질구레한 세파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 무심이 참으로 지극하지 않은가.

 

<장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스승 남백자기의 모습이 전과 사뭇 달라서 제자가 묻는다.

"오늘 스승님의 모습이 전과는 다릅니다."

남백자기는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제자에게 묻는다.

"스승님 모습이 꼭 실연당한 사람과 같습니다."

스승은 제자를 칭찬하며 말한다.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吾喪我]."

 

상아(喪我), 망아(忘我), 몰아(沒我), 무아(無我)는 모두 '나'를 잃은 상태를 말한다.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궁극적 목적이 아닐까.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과연 어디서 올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나'를 잃어버린 남백자기의 모습이 소를 닮지 않았을까고 나는 상상한다. 풀밭에 누워 편안히 되새김질하고 있는 소는 무엇이 오고가는 걸 의식하지 않는다. 와도 그만 가도 그만, 그저 무심히 바라볼 뿐이다. 소는 인간의 소리나 땅의 소리가 아니라,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를 듣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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