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잡힌 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 마르코 1,14-15
당대의 로마 역사가 요세푸스가 기록한 대로 세례자 요한의 체포와 처형은 역사적 사실이다. AD 29년쯤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예수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당시에 주목을 받은 인물이 누구였는지 추론해 볼 수 있다.
요한은 두려움이 없었다. 정치나 종교 권력층에 대한 독설을 서슴치 않았다. 요한의 투옥이 예수에게 영향을 주었을까?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래아에서 첫 활동을 시작한다. 중앙의 주목을 덜 받아서 위험 요소가 적은 이점이 있을 것이다.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는 자신의 이적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소문이 퍼지는 것을 꺼리지 않았나 싶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하느님 나라'는 예수가 선포한 복음의 알짬이다. 이 첫 외침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언급할 때 그분 마음속에는 어떤 이미지가 그려져 있었을까. 이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각자 신앙의 방향이나 질이 결정된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의 본뜻에 다가갈 수 있을까. 심지어 예수를 직접 따라다닌 제자들도 예수의 '하느님 나라'를 오해하고 있었음을 성경 곳곳에서 확인한다. 하물며 2천 년이나 지난 이 시점의 우리는 오죽하랴.
나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해방의 복음으로 이해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완고한 유대교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억압받는 민중을 보는 예수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는 상황이다. 예수는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神性)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모두 귀한 존재이고 평등하다. 또한 예수의 여정은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고난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상을 예수는 꿈꾸지 않았을까.
예수가 말한 '회개'는 현재 기독교에서 쓰이는 회개(죄와 연관된)와는 개념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기독교가 생기기 전이었다. 인류의 대속이라는 교리도 없었다. 회개의 원뜻은 '돌아섬'이라고 배웠다. 건너가기, 즉 가치관의 전환이다. 회심(回心)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하느님 나라, 복음을 믿는 것은 기존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거듭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영혼의 새로운 자각이다. 결코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이런 내적 변화를 거친 뒤에 나오는 "믿습니다"라는 고백이야말로 참된 믿음이 아닐까.
예수의 복음(福音)은 우리를 얽어매는 온갖 굴레에서 해방되어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복된 소식'이 된다. 2천 년 전 유대인과 비교할 때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의 '하느님 나라' 메시지가 이 시대에도 유효한 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