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마르코복음[2]

샌. 2020. 12. 21. 10:17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 심부름꾼을 먼저 보내니

그가 네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부르짖는 소리니라.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굽은 길을 바르게 하여라."

 

하고 씌어 있는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했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주민과 예루살렘 사람 모두가 그에게 나아가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 그는 이렇게 선포했다. "나보다 굳센 분이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허리 굽혀 그분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입니다."

그 무렵 예수께서 갈릴레아 나자렛에서 요르단 강으로 와서 요한한테 세례를 받으셨는데, 물에서 올라오시자 곧 하늘이 갈라지며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리는 것이 보였다. 이 때 하늘에서 소리가 울렸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나는 너를 어여삐 여기노라.

 

- 마르코 1,2-11

 

 

마르코복음서에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나 유년 시절 일화가 생략되었다. 예수 생전의 기록을 모두 수집한 마르코가 과감하게 제외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마르코는 예수와 세례자 요한과의 만남으로 복음서를 시작한다. 그만큼 둘의 만남은 예수의 삶에서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예수 생애의 물줄기를 바꾼 둘을 꼽으라면 여기 나오는 세례자 요한과의 만남과 뒷날의 변모산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세례자 요한과의 만남은 예수 공생애의 출발점이다. 이때 하느님의 소명을 깨닫고 갈릴레아의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변모산 사건은 예수가 갈릴레아의 무대를 벗어나 예루살렘으로 진격한(?) 계기가 되었다.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예수로 변했다.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떼면서부터 예수는 자기 죽음을 예감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만남이 간단히 기록되었고, 세례자 요한이 예수의 보조 역할로 나오지만 실제는 상상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새로운 종교 운동을 펼치는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온 유대 지방 주민과 예루살렘 사람 모두가 그에게 나아가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마르코의 기록으로 볼진대 엄청난 민중의 호응을 받았으리라. 당연히 기득권 세력한테는 눈엣가시였다.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번제가 아니라 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은 기존의 유대교 교리를 무시하는 획기적인 주장이었다.

 

갈릴레아에 있던 예수 역시 이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세례자 요한을 찾아갔을 것이다. 예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칭을 볼 때 예수와 세례자 요한은 상당 기간 함께 지냈을 가능성이 크다.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는 어떤 고리든 에세나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행간의 숨은 얘기를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세례자 요한의 집단에서 예수는 특출한 영적 자질을 보였을 테고 당연히 세례자 요한의 눈에도 띄었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성전 시스템에 의존하며 종교적 혜택을 누리던 유대교 지도층과는 달랐다. 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무소유와 금욕을 실천했다. 세례자 요한은 정신의 각성을 요구했고 민중의 다수는 그를 따랐다. 요단강에서 새로운 종교 운동을 펼친 셈이다. 예수도 이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때가 되자 세례자 요한을 떠난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 뒤부터다. 예수의 고독한 여정이 이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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