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누군가 '여래는 스스로 있는 나, 죽지 않는 나, 바뀌지 않는 나, 숨 쉬는 나, 이런 모든 나에 대한 견해를 가르친다'라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하는 참뜻을 잘 알았다고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그런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참뜻을 바르게 알았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행복하신 분께서 말씀하시는 '스스로 있는 나', '죽지 않는 나', '바뀌지 않는 나', '숨 쉬는 나'는 참으로 그런 나가 아니라 그런 나라고 이름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위 없는 깨달음에 마음 낸 님들은 있고 없는 모든 것들을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믿고, 이와 같이 깨달아서 그것들에 대해 '그것은 어떤 것이다'라는 생각을 내어서는 안 됩니다. 수보리여, 여래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은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라 이름할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 금강경 31(생겨남이 없는 앎과 견해, 知見不生分)
세상을 살면서 어찌 판단이나 견해가 없을 수 있겠는가.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이 내 소아(小我)에서 나온 좁은 분별심임을 볼 수 있도록 깨어 있으라는 뜻이리라. 그렇게만 되어도 애착이나 집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깨달음도 예외가 아니다. 만상이 '이름할 뿐'임을 모르는 것이 전도망상(顚到忘想)이다.
장미는 이유 없이 존재한다.
그것은 피기 때문에 필 뿐이다.
장미는 그 자신에도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지도 묻지 않는다.
- 안겔루스 질레지우스
시인이 노래한 장미처럼 존재하는 것이 이 분(分)의 제목인 '생겨남이 없는 앎과 견해'가 아닐까. 비교와 분별심이 사라진 자리에 고요한 평화가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