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마르코복음[22]

샌. 2021. 8. 29. 11:27

예수께서 배를 타고 다시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모여와서 호숫가에 있었다. 그런데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와서 뵙고 엎드려 간청했다.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와서 손을 얹어 주시어, 아이가 구원받아 살도록 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와 함께 그곳을 떠나시는데, 많은 군중이 뒤따르며 그분을 밀쳤다. 그 가운데 한 부인은 열두 해 동안 하혈을 해 왔는데 여러 의사를 찾아다니며 숱한 고생을 하고 가진 것을 모두 털어 썼지만 아무 효험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 부인이 예수 소문을 들은 바 있어, 군중 속에 끼여들었다가 뒤에서 그분 옷을 만졌다. 속으로 "옷만 만져도 구원받겠지" 했던 것이다. 그러자 곧 피 나던 곳이 말랐고, 부인은 병고에서 나은 것을 몸으로 느껴 알았다. 이때 예수께서 당신한테서 능력이 나간 것을 곧 알아채시고, 군중을 뒤돌아보며 "누가 내 옷을 만졌습니까?" 하셨다. 제자들이 "보시다시피 군중이 밀치고 있는데, 누가 만졌느냐고 하십니까?" 하였다. 그래도 예수께서는 만진 사람을 찾으려고 둘러보셨다. 부인이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에 무서워 떨며 나와서는 예수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습니다. 평안히 가시오. 그리고 병고에서 나아 건강해지시오."

이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왜 선생님을 수고롭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예수께서 귓결에 듣고 회당장에게 "겁내지 말고 믿기만 하시오" 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기 요한 말고는 아무도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다. 일행은 회당장 집으로 갔다. 예수께서 소란스런 법석판과 우는 사람들, 큰 소리로 곡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씀하셨다.

"왜들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습니까?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두 내쫓고 나서 아이의 부모와 당신 일행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붙잡고는 "탈리다 쿰" 하셨다. 번역하면 "소녀야, 너에게 이르노니, 일어나거라"이다. 그러자 곧 소녀가 일어서서 걸어다녔다.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이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엄명하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 마르코 5, 21-43

 

 

하혈하는 부인의 간절한 심정에 대해 감정이입해 본다. 피가 멎지 않는 병이니까 혈우병이 아닌가 싶다. 열두 해 동안 온갖 노력을 해도 상태는 점점 심해지며 나을 가망은 사라지고 있었다. 본인의 괴로움만 아니라 가족에 대한 미안함, 이웃의 차가운 시선은 오죽했겠는가. 당시에 이런 병은 하느님의 저주로 인식되던 때였다. 그런 부인이 예수의 소식을 들었다.

 

마침 예수는 게라사인 지방에서 다시 갈릴래아로 돌아왔다. 많은 군중에 섞여 부인도 예수를 만나고자 애를 썼다. 부인은 연약한 병자의 몸으로 사람들을 밀치며 예수 가까이 가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을 쳤을 것인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없던 힘도 생기는 법이다. 결국은 손을 뻗어 간신히 예수의 옷자락을 만질 수 있었는가 보다. 부인에게는 옷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죽기살기로 예수에게 향해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속담이 있다. 부인의 간절함이 하늘을 움직인 것이다. 뒤를 돌아본 예수의 따스한 눈길을 마주했을 때 부인의 두려움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뒤따른 예수의 말씀에 부인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대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습니다. 평안히 가시오. 그리고 병고에서 나아 건강해 지시오."

 

여기서 예수가 말씀한 '믿음'과 '구원'은 현재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뜻과는 개념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믿어서 구원받고 천국에 간다는 교리는 아직 생기기 전이었다. 종교적인 색채가 훨씬 옅은 의미가 아니었을까.

 

인간은 누구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예수의 꿈은 고통받고 억압받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이 아니었을까.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의 치유 이적은 비정상을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병든 자를 낫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이런 개별 사건을 통해 기적처럼 도래할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기적적으로 병에서 해방된 뒤의 부인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예수를 끝까지 따라다니며 활동을 도와준 여인들 중 한 명이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상상해 본다. 혈우병 부인이 나오는 이 장면은 예수의 여러 치유 이적 중에서도 무척 드라마틱하면서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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