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됫박 밑에나 침대 밑에 놓겠습니까? 등경 위에 놓지 않겠습니까? 숨겨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으시오."
또 말씀하셨다.
"새겨들으시오. 여러분이 되어 주는 되만큼 여러분에게 되어 주실 것이고 거기에 더 보태어 주실 것입니다.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실 것이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진 것마저 빼앗으실 것입니다."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이와 같습니다. 어떤 이가 땅에 씨를 뿌리고 나서 자고 일어나고 하는 가운데 밤과 낮이 가는데, 그가 모르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땅이 절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처음에는 줄기가 자라고,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또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가득 맺힙니다. 열매가 익으면 사람이 곧 낫을 댑니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줄까. 무슨 비유로 밝혀 보일까? 겨자씨와 같습니다. 뿌려질 때는 그것이 땅에 있는 모든 씨보다도 작습니다. 그러나 뿌려지면 자라서 어떤 푸성귀보다도 크게 되어 가지들을 뻗어서 '하늘의 새들의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여러 가지 비유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말씀을 들려 주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고, 제자들에게는 따로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
- 마르코 4,21-34
예수는 가르침을 설할 때 항상 비유로 말씀하셨다. 또한 이 대목을 보면 가르침에서 '하느님 나라'에 관한 내용이 주였음을 알 수 있다.
진리의 세계는 직관의 영역이다. 핵심을 전달하는 데 비유가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예수의 말씀 중 "무슨 비유로 밝혀 보일까?"에 예수가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가 들어 있다고 본다. 그렇더라도 예수의 진심에 접근한 사람은 극히 일부였을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군중 중 다수가 메시지보다는 병 치유 등 개인적인 이해에 관심이 있었던 듯 보인다. "들을 귀가 있거든 들으시오"에 예수의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심지어 제자들에게는 따로 뜻을 풀이해 주었지만 제자들마저 예수의 진심을 곡해했다. 뒷날 제자들의 행적이 잘 보여 준다. 여러 제자가 - 아니 대부분의 제자가 - 예수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려 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신의 욕망의 색안경에 더해 교리라는 두꺼운 벽이 예수의 본모습에 접근하려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예수가 말씀하신, 예수의 심중에 들어 있던, '하느님 나라'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로마의 압제와 유대교의 올가미에 시달리던 민중의 고통에 예수는 무엇을 희망으로 제시했는가? 여기에 대한 진지한 대답이 있는 그대로의 예수에 다가가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씨앗 비유에서 나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한 예수의 낙관성을 읽는다. 땅에 뿌려진 씨앗은 저절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난다. 시작은 겨자씨만큼 작지만 끝은 창대하다. 이때 예수는 하느님의 공의가 행해지는 새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