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마르코복음[18]

샌. 2021. 7. 19. 12:10

예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하도 많은 군중이 모여든지라, 그분은 배에 올라 호수에 자리잡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있었다.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많은 가르침을 베푸셨다.
"들어 보시오. 씨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습니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는데 흙이 깊지 않아 싹이 곧 돋아나기는 했지만 해가 솟자 타버렸습니다. 뿌리가 없어서 말랐습니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우거지자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 무럭무럭 자라서 열매를 맺는데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맺었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시오."
예수가 홀로 계실 때 주위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비유에 관해 묻자 말씀하셨다.
"그대들에게는 하느님 나라 신비를 알려 주셨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 같은 비유로 들리게 하십니다. '그들이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 그들이 돌아옴으로써 용서받을까 염려해서입니다.'"
이어서 말씀하셨다.
"이 비유도 못 알아들으니, 어떻게 그 모든 비유를 알겠습니까? 씨뿌리는 사람이 뿌리는 것은 말씀입니다. 길가에 뿌려지는 자란 이런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듣자마자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갑니다. 돌밭에 뿌려지는 자란 이런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듣는 대로 기꺼이 맞아들이지만 자기 속에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 한때뿐이고, 그래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넘어지고 맙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자란 이런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밖의 것들에 대한 욕심이 밀고들어오자 말씀이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자란 이런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열매를 냅니다."

- 마르코 4,1-20


예수는 비유를 써서 말씀을 전했다. 비유는 직관적으로 내용을 이해하기에 적당하다. 당시 예수를 따라다니던 민중에게는 더욱 효과적인 의미 전달법이었을 것이다.

<마르코복음>의 이 대목에서는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오고 예수의 해설까지 붙어 있다. 씨 뿌리는 이야기는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비유다. 무식하다고 못 알아들을 내용이 아니다. 사실 예수가 비유를 자주 쓰는 이유는 민중에게 자신의 생각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이 비유에 관해 묻자 예수의 대답은 엉뚱하다.

"그대들에게는 하느님 나라 신비를 알려 주셨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 같은 비유로 들리게 하십니다."
또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그들이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려는 것이니, 그들이 돌아옴으로써 용서받을까 염려해서입니다."

아직도 예수의 이 말씀은 나에게는 수수께끼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먼 바깥 나라를 찾아다닌 분이었다. 알아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돌아옴으로써 용서받을까 염려해서 비유를 써서 말했다니 예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폐쇄적 밀교 집단의 우두머리 같은 예수의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여전히 난감하다.

예수가 가르침을 설하지만 듣고도 따르지 않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비난하고, 옳은 소리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등을 돌리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비유는 아무리 쉽더라고 알아듣지 못하는 은유일 수 있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을 예수가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예수가 가르칠 때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알아듣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었지, 결코 다수의 바깥 사람들이 못 알아듣도록 하기 위함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이 부분이 실제 예수의 말씀일까, 하는데 의문을 갖는다. 복음서를 쓴 마르코 그룹이 '하느님 나라 신비'를 공유하는 당시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주는 메시지일 수 있다. 박해하는 로마인과 이방인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도 느껴진다. 집단의 내부 결속을 위해서는 선별 의식도 필요했을 것이다. 내 방식으로 읽는 <마르코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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