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일 때 윤리 과목을 좋아했다. 선생님이 전해 주는 여러 철학자들의 삶과 일화가 재미있었고, 그들의 명언이 멋지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제일 감명을 받았던 철학자는 디오게네스였다. 사람을 찾는다고 대낮에 등불을 들고 아테네 거리를 돌아다녔다거나, 알렉산더 대왕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도리어 햇빛을 가리니 비켜달라고 했다는 얘기는 너무나 통쾌했다. 저렇게 당당하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디오게네스는 견유학파에 속한다. '견유(犬儒)'란 '개 같은 선비(철학자)'라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모욕적인 명칭으로 들리지만 디오게네스가 스스로를 '개'라고 지칭했으니 잘못된 것도 아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그에게 뼈다귀를 던져주며 놀리자 개처럼 한 발을 들고 오줌을 갈겨댔다는 일화가 전한다. '견유'라는 이름에는 위선에 빠진 인간들을 조롱하는 측면이 있다. 나는 오랫동안 '견유'를 '개처럼 돌아다닌다'는 뜻으로 오해했다. 즉, 견유(犬遊)라고 읽은 것이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그렇게 해석해주지 않았나 싶다. 견유(犬儒)든 견유(犬遊)든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처럼 살고 싶다."
길거리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디오게네스에게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서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헛소리 말고)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키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나는 이 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신이 난다. 작은 권력 앞에서도 강아지 꼬리를 흔들며 비굴해지는 게 인간인데 천하를 점령한 알렉산더 대왕을 앞에 두고 어떻게 이런 배포가 나올 수 있을까. 현장에 있던 알렉산더를 비롯한 수행원들의 표정이나 반응이 어땠을까? 목을 자르겠다고 펄펄 뛰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의 목을 쳤다면 알렉산더가 아니었을 것이다. 알렉산더도 아리스토텔레스한테 교육을 받았으니 철학자를 존경하는 마음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었으리라.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살지만 당당하고 자유로운 디오게네스가 알렉산더는 정말로 부러웠을지 모른다.
철학 학교의 동문이었던 친구가 출세를 하여 부자가 되었다. 디오게네스는 으리으리한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 집안에 들어선 디오게네스가 갑자기 친구 얼굴에 침을 뱉었다. 깜짝 놀란 친구가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내자 디오게네스가 대답했다.
"야, 이놈아. 침 뱉을 데를 아무리 찾아봐도 네 얼굴밖에 없다."
디오게네스는 부나 명예, 권력을 헌신짝처럼 여겼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인간의 행복에 방해가 되는 요소였다. 대신 자연이 준 본능과 욕구를 따르는 삶을 살라고 했다. 디오게네스는 사람이 많이 모인 시장에서 거리낌 없이 자위를 하기도 했다.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듯이, 성욕의 해소도 부끄러운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디오게네스는 인간이 만든 관습이나 체면을 부정하면서 그대로 실천했다.
디오게네스는 범죄에 연루되어 시노페에서 쫓겨나 아테네로 왔다.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추방된 놈이라고 비난하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나에게 추방령을 내린 게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체류령을 내렸소."
디오게네스가 가진 것이라고는 낡은 옷 한 벌과 물컵 하나가 전부였다. 물컵마저도 어느 날 개가 혀로 물을 먹는 것을 보고는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개를 스승으로 삼았다. 말로는 무소유를 떠들지만 디오게네스만큼 무소유의 삶을 산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식은 주로 구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디오게네스는 실제 삶으로 세상 사람의 허위의식을 까발리는 자신의 철학을 펼쳐 보였다.
무엇이 디오게네스를 이토록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미친놈" "개 같은 놈"이라고 욕해도 디오게네스를 흔들 수는 없었다. 세상의 평판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디오게네스의 내면에는 세상의 편견에 대항하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너무나 작고 가볍다. 가는 미풍에도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너는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느냐?" 디오게네스의 물음에 나는 무엇이라 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