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 왕은 사람을 시켜 백기를 함양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게 했다. 백기가 길을 나서 함양의 서문에서 10리 거리에 있는 두우에 이르렀을 무렵, 진나라 소왕은 응후와 다른 신하들과 상의한 끝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기는 사는 곳을 옮겨 가면서 속으로는 복종하지 않고 뼈 있는 말을 했소."
진나라 왕은 곧 사자를 보내 백기에게 칼을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했다. 백기는 칼을 받아 들고 자신의 목을 찌르려다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잠시 동안 그렇게 있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 명을 속여서 모두 산 채로 땅속에 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그러고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진나라 소왕 50년 11월의 일이다. 그는 죽었지만 죄를 지은 것은 아니므로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가엾게 여겨 마을이 모두 제사를 지내 주었다.
- 사기(史記) 13-1, 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
백기(白起)와 왕전(王翦)은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군이다. 백기는 재상이었던 양후에 의해 발탁되어 진나라 소왕을 섬기며 동쪽으로 위, 한, 조, 남쪽으로 초나라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기초는 이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책사인 범저가 등장하고 소왕이 범저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양후와 백기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범저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거기에는 너무 자신의 공을 과신한 백기의 실책도 있었다고 보인다. 왕이 출정을 명했지만 백기는 수 차례 거부하며 전장에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소왕은 화가 나서 백기를 삭탈관직시키고 벽지로 쫓아냈다. 그 뒤에는 여기 나오는 장면처럼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수십 년 동안 진나라 군대를 지휘하며 연전연승했던 백기는 자신감이 충만했으리라. 군대의 실권을 쥐고 있었으니 나중에는 왕의 명령조차 거절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역린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역사에서 수많은 사례가 말해준다. 백기는 죽으면서도 왕에게 굽히지 않았다. 전장에서 너무 많은 목숨을 죽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마땅한 대가가 돌아왔다고 말한다. 결코 왕의 명령에 따라 죽는 것이 아니라는 자존심이 대단하다.
여기 나오는 장평 전투는 백기가 조나라를 물리친 전투를 말한다. 백기는 조나라 군사를 포위하고 고사작전에 들어갔다. 한 달 넘게 보급을 받지 못한 조나라 군사들은 서로 죽여 살을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포위망을 뚫기 위해 조나라 장군 조괄이 정예병을 이끌고 나왔으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장군이 죽자 조나라 군사 40만 명이 백기에게 항복했다. 이때 백기는 수십 만의 포로를 생매장해서 죽였다고 한다. 백기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저지른 그때의 잔인한 일이 떠올랐던 것 같다.
공을 세웠으면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천 년 만 년 권세를 누리리라고 자만해선 안 된다. 한때의 영화에 너무 취하면 사리 분별력이 흐려진다. 권력을 가졌거나 곁불을 쬐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