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사기[12]

샌. 2024. 1. 30. 18:04

소왕 36년에 상국(相國) 양후는 객경 조(竈)와 상의하여 제나라를 쳐서 감읍, 수읍을 빼앗아 자기의 도읍을 넓히려고 했다. 이때 위나라 사람 범저(范雎)가 스스로를 장록(張祿) 선생이라 하면서 양후가 제나라를 공격하는데, 삼진을 넘어서 제나라를 치는 것을 비난하고는, 이 기회를 틈타 자기의 주장을 진나라 소왕에게 말했다. 이에 소왕을 곧바로 범저를 등용했다. 범저는 선 태후가 제멋대로 정권을 휘두르는 일, 양후가 제후들 사이에서 권세를 떨치는 일, 경양군과 고릉군의 무리가 지나치게 사치스러워 왕실보다도 부유한 일 등을 말했다. 이에 소왕도 깨달은 바가 있어 상국 양후를 파면시키고 경양군 등 그 일족을 모두 함곡관 너머 자기들의 봉읍으로 가서 살도록 했다. 양후가 함곡관을 나갈 때 짐수레가 1000대도 넘었다. 양후는 도읍에서 죽어 그곳에 장사 지냈다. 그 뒤 진나라에서는 도읍을 거두고 군을 두었다.

 

- 사기(史記) 12, 양후열전(穣候列傳)

 

 

BC 300년 무렵의 일이다. 진나라가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며 강성해지고 있을 때였다. 진나라 무왕(武王)이 죽고 어린 소왕(昭王)이 왕위에 오르자, 선 태후가 섭정을 하면서 외삼촌인 양후가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양후는 30여 년에 걸쳐 진나라 재상을 지내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부를 쌓았다. 한창 위세를 떨칠 때 양후의 재산은 왕실보다 많았다고 한다.

 

양후는 백기 장군와 손을 잡고 주변 국가들을 병합해 나갔다. 초나라 수도인 영을 함락하고, 이웃인 위, 조, 한나라를 너머 제나라까지 공격하려 했다. 이때 위나라 수고(須賈)와 제나라 소대의 외교술로 작은 나라들은 위기를 모면했다. 양후가 이들에게 설득당한 것을 보면 양후는 모험을 택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자신이 이룬 직위나 부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소왕 36년에 범저가 등장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범저의 말을 들은 소왕은 자신이 오랫동안 양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소왕은 양후를 파면하고 함곡관 너머로 쫓아냈다. 이때 양후의 살림을 옮기는 짐수레가 1000대가 넘었다고 한다. 그나마 목숨과 재산을 건진 것으로 위안을 삼았을까.

 

인간은 권력을 잡으면 사욕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되는가 보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도 많은 권력자들이 이런 행태를 보였다. 청백리까지는 아닐지라도 적당한 선에서 멈출 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권세를 뺏기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양후는 말년을 근심과 번민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높이 오르면 추락도 깊다. 역사에는 수많은 양후가 있어 귀감으로 살을 만하지만, 권력을 잡게 되면 도취되어 눈이 멀어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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