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사기[10-3]

샌. 2023. 12. 30. 10:41

"일찍이 왕께 변장자(卞莊子)라는 이가 호랑이를 찔러 죽인 일을 들려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까? 변장자가 호랑이를 찌르려고 하자, 묵고 있던 여관의 심부름하는 아이가 말리면서 '호랑이 두 마리가 소를 잡아먹으려 합니다. 먹어 봐서 맛이 좋으면 분명히 서로 다툴 것입니다. 다투게 되면 반드시 싸울 테고, 서로 싸우게 되면 큰 놈은 상처를 입고 작은 놈은 죽을 것입니다. 상처 입은 놈을 찔러 죽이면 한꺼번에 호랑이 두 마리를 잡았다는 명성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변장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서 기다렸습니다. 조금 있으니 정말 두 호랑이가 싸워서 큰 놈은 상처를 입고 작은 놈은 죽었습니다. 이때 변장자가 상처 입은 놈을 찔러 죽이니 한 번에 호랑이 두 마리를 잡는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지금 한나라와 위나라가 싸움을 벌인 지 한 해가 넘도록 해결이 나지 않았다면 큰 나라른 타격을 입고 작은 나라는 멸망할 것입니다. 타격 입은 나라를 치면 한꺼번에 둘을 얻는 이득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변장자가 호랑이를 찔러 죽인 것과 같은 일입니다."

 

- 사기(史記) 10-3, 장의열전(張儀列傳)

 

 

진진(陳軫)이 진나라 혜왕에게 한 발언이다. 진진은 장의와 동시대를 살았던 같은 연횡파의 유세가다. 당시 한나라와 위나라가 전쟁중이었는데 혜왕은 두 나라의 화해를 주선하는 게 좋은지 물었다. 주선하는 편이 낫다는 신하도 있었고, 주선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신하도 있었다. 혜왕이 망설이고 있을 때 초나라에서 진진이 도착했고, 진진은 변장자의 호랑이 비유를 들며 두 나라를 한꺼번에 제압하라고 조언했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인 셈이다.

 

<사기>에 기록된 유세가들의 말에는 비유가 많이 나온다. 왕에게 간언을 할 때는 꼭 비유를 쓴다. 이 호랑이 비유도 그중 하나다. 비유는 내가 의도하는 바를 다른 대상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다. 뜻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는 비유 만한 게 없는 것 같다. 어떤 비유를 쓰느냐에 따라 상대방을 설득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고사를 충분히 습득하고 이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기법이 유세가에게는 중요했을 것 같다.

 

혜왕은 진진의 충고를 듣고 두 나라를 화해시키지 않았다. 그 뒤 두 나라가 지쳤을 때 진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둘을 크게 쳐부셨다. 진진의 계책이 성공한 셈이다. '장의열전'에는 장의(張儀), 진진(陳軫), 서수(犀首) 등 세 사람 유세가의 활동상이 적혀 있다. 셋은 진나라가 주 활동 무대였고 여러 나라의 재상을 겸하며 진나라가 전국시대의 패자가 되는 데 일조했다. 이때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100년 전 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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