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하얀 리본

샌. 2010. 7. 16. 09:47


무겁고 우울한 영화다. 1910년대의 평화롭고 고요해 보이는 독일의 한 작은 마을, 마을 의사가 말을 타고 가다가 누군가가 설치해 놓은 줄에 걸려 다치고, 연달아 방화, 사고사, 심지어 한 아이의 눈이 도려내지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범인은 알 수 없다.


다른 스릴러처럼 범인을 찾아내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은 아니다. 누가 범인인지는 밝혀지지도 않는다. 조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과 억압의 구조, 그리고 어두운 인간 본성을 접하게 되면 마음이 착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1910년대의 독일의 작은 마을 이야기가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도 통용되는 얘기이기에 영화의 메시지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


마을은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속은 질식할 듯 답답하다. 전통과 권위를 걸친 어른들의 세계는 썩어 있고 위선적이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전통적인 권위 - 종교, 관습, 폭력 등 - 에 짓눌려 꼼짝달싹 못한다. 마을 목사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게 하얀 리본을 팔에 매게 해서 복종과 순결을 강요한다. 이런 어른들의 폭력 속에서 아이들의 정신세계는 병들고 반항적이 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타락과 위선을 눈치 채고 있는데, 그저 말없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지켜본다. 영화에는 아이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 같은 암시가 나온다. 그런 아이들의 무표정과 냉담이 무섭기도 하다.


영화의 중심은 의사와 목사, 남작의 가정이다. 그중에서도 의사는 기성세대의 타락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딸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근친상간을 하는 장면도 있다. 목사는 종교적 권위로 인해 오히려 아이들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 남작은 마을의 지배자인데 인간미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인물이다. 영화는 두 시간 이상을 웃음도 없고 음악도 없이 흑백화면에 이런 무거운 풍경을 담고 있다. 목사 서재에 있는 새를 칼로 찔러죽이고 책상 위에 놓아두는 딸의 행동 같은 아이들의 반항이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한다.


나는 이 영화를 ‘인간을 억압하는 폭력의 구조’에 대한 고발로 읽었다. 인간을 억압하는 폭력은 전통적인 권위에서 나온다. 그 권위는 국가, 종교, 이데올로기, 전통적인 관습, 힘의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런 권위가 강하면 강할수록 인간의 심성은 왜곡되고 일그러진다. 힘 있는 자들의 약자 억압, 종교와 순수란 이름으로의 영혼 억압, 규제와 제도에 물들어버린 어른들의 경직성은 권위적이고 통제되는 사회의 특징이다. 이런 사회에서 가장 큰 희생자는 물론 아이들과 여자들이다.


영화의 끝에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알리는 소식이 나온다. 아마 감독은 이 마을 이야기를 통해서 파시즘화 하는 독일이 어떻게 폭력적으로 변하는지를 경고하고 싶었던지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상황이 결코 과거의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화 속 어두운 표정의 아이들을 보며 나는 자꾸만 지금 한국의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다. 나쁜 체제가 인간에게 미치는 상흔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아이들이 어른으로 자라서 만드는 세상은 또 어떤 것일까. 그러나 나쁜 체제의 배후에는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이 있음을 영화는 지적한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은 이 영화의 분위기만큼이나 어둡고 암울하다.


S 형과 씨네큐브에서 보았다. 생각보다 관객들이 많았는데 의외로 여성 관객들이 대부분이었다. 앞에 앉았던 젊은 아가씨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잠들고 말았지만....







'읽고본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를 부르는 숲  (0) 2010.08.03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  (0) 2010.07.26
작은 연못  (0) 2010.07.07
신은 위대하지 않다  (0) 2010.06.19
봄비 여름비 가을비 겨울비  (0) 2010.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