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5

어떤 적막 / 정현종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고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 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일가(一家)를 이룬다 -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 어떤 적막 / 정현종 쓸쓸함이 그대의 부재 때문만은 아니다. 시든 꽃팔찌를 바라보는 내 탓도 아니다. 쓸쓸함은 존재의 근원에서 퍼져 나가는 둥근 파문이 아닐까. 너와 나의 파문이 만나면 우리 마음은 어떤 형상이나 이미지를 만든다. 그 보이는 형상이나 이미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적막으로 일가(一家)를 이룬다." 아예 한 몸이 되시는구나. 우주가 수..

시읽는기쁨 2023.11.29

고요한 밤

하루 중 제일 귀한 시간이 한밤중에 침대에 들 때다. 자정이 지나 위층 집이 잠이 들면 주변은 완벽히 조용해진다. 아무리 귀를 쫑긋해도 들리는 소리는 없다. 마치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듯 세상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진 것 같다. 이 시간이야말로 일상에서의 해방감으로 충만해지는 때다. 존재의 근원에 닿은 느낌 같기도 하다. 아, 나는 행복하구나, 라는 말이 절로 속삭여진다. 잡념도 사라지고 하루의 반성도 필요 없다. 그저 있는 자체로 기쁨이다. 그렇게 있다가 스르르 잠이 든다. 나에게는 하루의 소란을 잠재워 줄 이 절대 고요가 필요하다. 짧은 시간이지만 고요 속에서 낮의 어지러움이 앙금처럼 가라앉는다. 마음이 맑고 편안해진다. 내면의 침묵을 경험하는 몇 안 되는 시간 중 하나가 이때다. 바깥 핑계를 대지만 ..

참살이의꿈 2015.02.09

조용한 일 /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조용한 일 / 김사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는 나뭇잎이 아닌가 싶다. 너무나 흔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만 색깔이나 모양이 나뭇잎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는 것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류마다 잎의 모양이나 색깔이 다르고, 그 미묘한 차이가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잎의 부드러운 감촉도 좋고, 실핏줄 같은 잎맥도 예쁘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의 춤은 또 어떤가. 가을 단풍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과 풍경을 연출한다. 나뭇잎은 나무에서 돋아나 평생을 나무를 위해 일하고, 나무의 성장을 돕는다. 물과 공기와 햇빛 만..

시읽는기쁨 2008.08.22

이런 고요 / 유재영

하늘길 먼 여행에서 돌아온 구름 가족이 희고 부드러운 목덜미를 잠시 수면에 담그고 있는 동안 이곳에서 생애의 첫여름을 보낸 호기심 많은 갈겨니 새끼들이 물 밖으로 튀어 올랐다가 다시 수초 사이로 재빨리 사라진다 일순, 움찔했던 저수지가 다시 조용해졌다 - 이런 고요 / 유재영 도시로 돌아오니 문명의 소음이 제일 먼저 반긴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때문에 잠이 들지 않는다. 여름밤이건만 풀벌레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다. 아니 들을 수가 없다. 불쌍한 도시인들은 고요를 빼앗겼다. 이런 데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적당히길들여지는 길밖에는 없다. 문득 바쇼의 하이쿠가 떠오른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소리'

시읽는기쁨 2006.08.19

소리들 / 나희덕

승부역에 가면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구름 옮겨가는 소리 지붕이 지붕에게 중얼거리는 소리 그 소리에 뒤척이는 길 위로 모녀가 손 잡고 마을을 내려오는 소리 발 밑의 흙이 자글거리는 소리 계곡물이 얼음장 건드리며 가는 소리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송아지 다시 고개 돌리고 여물 되새기는 소리 마른 꽃대들 싸르락거리는 소리 소리들만 이야기하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겨울 승부역 소리들로 하염없이 붐비는 고요도 세 평 - 소리들 / 나희덕 소리가 끊어져야 소리가 들린다. 진공이 단순한 무(無)가 아니듯, 우리 귀의 고막을 울리지 않는다고 소리 없음이 아니다. 오히려 들리지 않는 소리로 가득하다.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 대음희성(大音希聲)...... 세상..

시읽는기쁨 2004.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