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9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 고은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오래오래 우리나라는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었다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시읽는기쁨 2024.06.01

순간의 꽃 / 고은

오늘도 누구의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 나무들이 나를 보고 있다 * 봄비 촉촉 내리는 날 누가 오시나 한두 번 내다보았네 *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 사진관 진열장 아이 못 낳는 아낙이 남의 아이 돌사진 눈웃음지며 들여다본다 * 부들 끝에 앉은 새끼 잠자리 온 세상이 삥 둘러섰네 * 이 세상이란 여기 나비 노니는데 저기 거미집 있네 * 어린 토끼 주둥이 봐 개꼬리 봐 이런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니 * 위뜸 아래뜸 개가 짖는다 밤 손님의 성(姓) 김가인가 박가인가 * 내려갈 때 보았네 올가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한번 더 살고 싶은 때가 왜 없겠는가 죽은 붕어의 뜬 눈 * 설날 늙은 거지 마을 한 바퀴 돌다 태평성대 별것이던가 * 방금 도끼에 쪼개어진 장..

시읽는기쁨 2013.06.21

낯선 곳 / 고은

떠나라 낯선 곳으로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아기가 만들어낸 말의 새로움으로 할머니를 알루빠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그리하여 할머니조차 새로움이 되는 곳 그 낯선 곳으로 떠나라 그대 온갖 추억과 사전을 버리고 빈주먹조차 버리고 떠나라 떠나는 것이야말로 그대의 재생을 뛰어넘어 최초의 탄생이다. 떠나라 - 낯선 곳 / 고은 그랜드 캐니언을 보고 싶어 아메리카로 간다. 고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의 국어 시간, 교과서에 실린 천관우의 그랜드 캐니언 기행문을 읽었을 때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다짐했었다. 언젠가 나도 그랜드 캐니언에 설 것이라고. 그 꿈이 이제 실현되려 한다. 이번 패키지여행에는 캐나디안 로키도 ..

시읽는기쁨 2013.02.21

사랑 / 고은

사랑이 뭐냐고 문기초등학교 아이가 물었다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궁한 나머지 지나가는 새 바라보며 얼버무렸다 네가 커서 할일이란다 돌아서서 후회막급 사랑할 때밖에는 삶이 아니란다라고 왜 대답하지 못했던가 그 아이의 어른은 내일이 이미 오늘인 것을 왜 몰랐던가 저녁 한천가 한 사내의 낚시줄에 걸려버린 참붕어의 절망이 내 절망인 것을 왜 몰랐던가 사랑이 뭐냐고 물었을 때 - 사랑 / 고은 '사랑할 때밖에는 삶이 아니란다'라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두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게 사랑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아끼고 보살피는 것도 사랑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사랑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사랑이란 '공감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타자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고, 슬픔..

시읽는기쁨 2011.12.02

자전거 / 고은

수유리 안병무네 집 마당에서 초례 마치고 한강가에서 하룻밤 자고 안성 대림동산으로 왔다 상화 남편은 얼간이 성화는 철부지 축의금 봉투를 꺼내보았다 이백만원 얼마 상화 상화 남편 둘이 지닌 것 털어 집을 샀으니 화곡동 집 팔리지 않고 억지로 집을 샀으니 이백만원 얼마 이것으로 살아야 했다 마음속 화수분이라 무어나 차고 무어나 넘쳤다 마음 밖 가난이라 전화도 없다 전화 걸려면 십분쯤 가서 고개 너머 관리사무소 전화를 빌려야 한다 민음사에서도 문익환도 전보로 급래급래를 알려왔다 이백만원 얼마는 곧 동났다 안성장에 가 빗자루 사고 삽도 호미도 샀다 개수대 그릇도 샀다 빈털터리인데 창비에서 원고료가 왔다 살았다 살았다 무턱대고 자전거 한 틀을 샀다 자전거에 상화를 태우고 상화 남편은 견마를 잡혔다 삼단 자전거 바..

시읽는기쁨 2011.09.02

비로소 / 고은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 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 비로소 / 고은 짧고 쉽다. 누구나 쓸 것 같으면서도 아무나 쓸 수 없다. 인생의 한 경지에 들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노래다. 시인의 다른 시 '그 꽃'이 떠오른다. '내려갈 때 / 보았네 / 올라갈 때 / 보지 못한 / 그 꽃'. 잃어야 얻을 수 있다는 건 만고의 진리다. 목표를 향하여 앞으로만 나아갈 때 주위를 돌아볼 여유는 없다. 노를 놓쳤을 때 비로소 넓은 물이 보인다. 구름이 보이고 돛단배도 보인다. 산이 산으로 보이고, 물이 물로 보인다. 지금 내가 젓고 있는 노는 무엇인가? 정신 없이 노를 저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시읽는기쁨 2011.06.23

어떤 기쁨 / 고은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생각했던 것 울지 마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생각하고 있는 것 울지 마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막 생각하려는 것 울지 마라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 세계에서 이 세계의 어디에서 나는 수많은 나로 이루어졌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는 수많은 남과 남으로 이루어졌다 울지 마라 - 어떤 기쁨 / 고은 오늘 저녁 SBS의 '내 마음의 쉼표'에 고은 선생이 출연하셨다. 선생이 10대 후반 시절 6.25를 피해 선유도로 피난 가셨는데 60년이 지난 지금 그곳으로 다시 추억 여행을 하시는 내용이었다. 선생의 소년 같은 해맑은 미소와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TV를 보면서 나에게도 아련한 옛 추억이 떠올랐다. 지금..

시읽는기쁨 2011.02.21

그대 순례 / 고은

좀 느린 걸음걸이면 된다 갑자기 비가 오면 그게 그대 옛 친구야 푹 젖어보아라 가는 것만이 아름답다 한 군데서 몇 군데서 살기에는 너무 큰 세상 해질녘까지 가고 가거라 그대 단짝 느린 그림자와 함께 흐린 날이면 그것 없이도 그냥 가거라 - 그대 순례 / 고은 몇 달에 걸쳐 오체투지를 하며 성지를 찾아가는 티베트인들의 순례를 생각한다. 그들의 종교적 열정과 단순성이 부러울 때가 있다. 몇 달씩 생계를 놓아도 그들의 사는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가난과 자유로움이 도리어 부러울 때가 있다.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 나는 한 번도 나를 찾는 순례에 나서본 적이 없다. 일상의 무거운 짐 벗어버리고 육신을 먹여살릴 개나리봇짐 하나 메고 길 떠나본 적이 없다. 올라가는 일보다 내려가는 일이 더 중요하..

시읽는기쁨 2007.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