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 5

받들어 꽃 / 곽재구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아이들은 저희들 나이보다 많은 수의 장난감 무기들을 횡대로 늘어놓고 에잇 기관총 받아라 수류탄 받아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아뿔사 힘이 센 304호실 아이가 303호실 아이의 탱크를 짓누르고 짓눌린 303호실 아이가 기관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받들어 총을 한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떠들면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학용품 한아름을 골라주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얘기했다 아름답고 힘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

시읽는기쁨 2019.10.03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 곽재구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 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어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장이 목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또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

시읽는기쁨 2017.10.21

깡통 / 곽재구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 깡통 / ..

시읽는기쁨 2016.01.30

나무 / 곽재구

숲속에는 내가 잘 아는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무를 만나러 날마다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키 큰 나무와 제일 키 작은 나무에게 나는 차례로 인사를 합니다 먼 훗날 당신도 이 숲길로 오겠지요 내가 동무 삼은 나무들을 보며 그때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 나무 / 곽재구 나무는 사람처럼 분주하거나 소란스럽지 않다. 사람의 동네에서 나무들의 동네에 들어서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나무 사이를 걸으면 절로 나무를 닮게 된다. 숲길은 마음의 길로 이어진다. 그 옛날 당신이 걸었던 숲길을 찾는다. 그리고 처음처럼 속삭인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시읽는기쁨 2012.12.04

나룻물 강생원의 배삯 / 곽재구

나룻물 강생원 젊어서 제월리 나루터의 뱃사공이었지요 남원 장 보러 옥과 입면 사람들 강생원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건넜는데요 배가 남원 땅에 다 닿으면 장꾼들에게 꼭 이렇게 말하지요 어 참 봄볕도 좋다 돌아올 때 꽃 한 짐 꺾어 오시오 이를테면 그 말이 곧 뱃삯이었는데 장 보고 오는 동네 사람들 돌아오는 길에 진달래꽃 꺾고 살구꽃도 꺾고 수선화꽃이랑 조팝꽃도 실컷 꺾어서는 한아름씩 강생원에게 주었겠지요 한 배 가득 장 보따리와 꽃다발을 싣고 다시 강을 건너며 나룻물 강생원 꼭 이렇게 말하지요 어 참 꽃 좋다 어 참 세상 이쁘다 - 나룻물 강생원의 배삯 / 곽재구 사람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삶이 축제가 될 수는 없을까?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바라기 때문에 삶의 핵심을 도리어 놓치는지도 모른다. 나룻..

시읽는기쁨 2012.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