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받들어 꽃 / 곽재구

샌. 2019. 10. 3. 11:13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아이들은 저희들 나이보다 많은 수의

장난감 무기들을 횡대로 늘어놓고

에잇 기관총 받아라 수류탄 받아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아뿔사 힘이 센 304호실 아이가

303호실 아이의 탱크를 짓누르고

짓눌린 303호실 아이가 기관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받들어 총을 한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떠들면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학용품 한아름을 골라주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얘기했다

아름답고 힘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아파트 화단에 피어난 과꽃

한 송이를 꺾어들며 나는 조용히 얘기했다

그리고는 그 꽃을 향하여

낮고 튼튼한 목소리로

받들어 꽃

하고 경례를 했다

받들어 꽃 받들어 꽃 받들어 꽃

시키지도 않은 아이들의 경례소리가

과꽃이 지는 아파트 단지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 받들어 꽃 / 곽재구

 

 

손주를 지켜보며 내 유년 시절을 떠올린다. 노는 방식에서 차이가 크지만, 남자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것은 고금을 불문하고 전쟁놀이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유전자에 각인된 생존 본능일 것이다. 내 어릴 때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안 되었다.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아이들 놀이도 지금보다 훨씬 과격했다. 친구 동생은 막대기로 칼싸움을 하다가 왼쪽 눈이 실명되었다.

 

장난감이 없는 대신 살아 있는 생물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아이들 손에 죽어간 곤충들이 헤아릴 없이 많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엄청 잔인한 짓들이었다. 얼마 전 손주와 같은 또래들이 노는 걸 옆에서 본 적이 있다. 한 아이가 개미를 만지려 하자 다른 아이가 정색하며 말렸다. 개미는 작고 약하니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도 "맞아, 생명은 귀중한 거야"라고 말하며 바로 수긍했다. 우리 때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받들어 총'을 '받들어 꽃'으로 바꾸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 인류 역사를 볼 때 지금 우리는 전쟁 없는 꽤 긴 시기를 보내고 있다. 갈등이 폭발할 위험은 상존하고 인류를 절멸할 핵무기가 여전히 대기중이지만, 서로가 견제하며 힘을 자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국군의 날이 이틀 전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