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경안리에서 / 강민

샌. 2019. 9. 24. 11:07

"이 놈의 전쟁 언제나 끝나지. 빨리 끝나야 고향엘 갈 텐데."

때와 땀에 절어 새까만 감발을 풀며 그는 말했다.

부풀어 터진 그의 발바닥이 찢어진 이 강산의 슬픔을...

말해 주고 있었다

지치고 더럽게 얼룩진 그의 몸에선

어쩌면 그의 두고 온 고향 같은 냄새가 났다

1950년 8월의 경안리 주막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우리는 같은 또래끼리의

하염없는 얘기를 나누었다

적의(敵意)는 없었다

같은 말을 쓸 수 있다는 행복감마저 있었다

고급중학교에 다니다 강제로 끌려나와 여기까지

왔다는 그

그에게 나는 또 철없이 말했었다

"북이 쳐내려오니 남으로 달아나는 길"이라고

적의는 없었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굶주리고 지친 사람들은 모두 잠이 들고, 우리만

하염없는 얘기로 밤을 밝혔다

그리고 새벽에 그는 떠났다

"우리 죽지 말자"며 내밀던 그의 손

온기는 내 손아귀에 남아 있는데

그는 가고 없었다

냄새나고 지치고 더럽던 그의 몸과는 달리

새벽별처럼 총총하던 그의 눈길

1950년 8월 경안리

새벽의 주막 사립문가에서 나는 외로웠다

 

- 경안리에서 / 강민

 

 

경기도 광주 경안동(京安洞)내 이웃 동네다. 광주의 중심지기 때문에 시내에 볼일 보러 나가자면 경안동은 십중팔구 들러야 한다. 그래서 이 시가 각별하게 가깝다. 시에 나오는 주막이 있는 풍경은 지금은 상상할 수 없다. 69년 전 일이니 당연한 일이겠다. 경안동 옆으로 경안천이 흐르니 주막이 있는 장면은 충분히 그려볼 수 있다. 천 건너편의 쌍령동으로 오가는 길목 어딘가에 주막은 있었을 것이다. 현재 경안교가 지나는 자리 어디쯤이라 추측한다.

 

피난길에 나선 남쪽의 젊은이와 북에서 내려온 젊은 군인이 만났다. 전쟁통이지만 둘은 밤을 새우며 대화를 나눈다. 적의(敵意)는 없었다. 이념이나 사상, 무기는 인간과 인간의 만남 앞에서 껍데기일 뿐이다. 우리를 둘러싼 허울을 벗어던지면 인간의 따스한 가슴이 남는다. 그게 인간의 진면목이 아닐까. 그날 밤 두 젊은이의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온기는 남과 북의 대치, 여와 야의 냉혹한 정치 싸움 가운데서도 면면히 살아있다고 믿고 싶다.

 

시의 내용은 시인이 실제 경험한 일일 것이다. 화약 냄새 풍기는 전쟁터에서 잠시 피어난 둘의 우정과 교감이 눈물겹다. "이놈의 전쟁 언제나 끝나지. 빨리 끝나야 고향엘 갈 텐데."라고 말한 북의 젊은이는 과연 고향으로 돌아갔을까. 당시 전쟁 상황으로 봤을 때 그의 유골이 남쪽 땅 어딘가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젊은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경안동의 천변을 지날 때면 69년 전의 두 젊은이를 떠올린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남과 북은 여전히 대치 상태며 통일의 길은 멀고 험하다. 가슴을 열고 마주 앉으면 손 못 잡을 일 어디 있으랴. 어서 빨리 껍데기는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