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14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시읽는기쁨 2023.11.06

할아버지는 왜 화를 내요?

"할아버지는 왜 자꾸 화를 내요?" 어느 날 손주한테서 느닷없이 받은 질문이다. 뜨끔했다. 아내에게서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겠지만 손주는 달랐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 손주가 반문했다. "답답해서 그래요?" 맞았다. 조금 전 상황이 그랬기 때문이다. 질문이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화가 날 때 참을 수 없나요?" 나는 겨우 답했다. "열에 아홉은 참고 한 번 화를 내는 거야." 옆에 있던 아내가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과 동시에 손주가 말했다. "내가 볼 때 열이면 두 번만 참고 여덟 번은 화내는 것 같아요." 옆에서 아내는 손뼉을 쳤다. 손주한테서까지 이런 말을 듣는 게 너무 창피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내가 잘못된 것이다. 아이들 앞에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겠..

길위의단상 2022.10.07

찌질한 위인전

인간에게는 누구나 찌질한 면이 있다. 소위 위인이라고 불리는 인물도 예외가 아니다. 보통의 위인전은 찌질한 면은 드러내지 않고 비범한 능력이나 업적만 자랑한다. 지나친 미화에 실상 왜곡이다. 어릴 때는 누구나 위인전을 보며 자란다. 훌륭한 사람을 본받으라지만 지금 돌아보면 위인전이 과연 아이들 인성에 선한 작용을 하는지 의문이 든다. 전쟁을 일으키고 수만 명을 죽인 놈도 위인에 들어가 있다. 은 그런 위인전에 딴지를 건다. 함현식 기자가 딴지일보에 연재했던 내용을 모았다. 책에는 아홉 명의 인물이 나온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아니듯, 그들 역시 완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적이고 오히려 빛나 보인다. 자신의 약점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도 있겠지만, 자신의 찌질함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맞서 싸우면서 역사에 ..

읽고본느낌 2021.08.19

김수영의 연인

올해가 김수영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된다. 이 책은 시인의 부인인 김현경 여사가 쓴 에세이로 김수영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시인을 처음 만나 결혼하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이별하기까지 두 분의 삶을 진솔하게 밝히고 있다. 여사는 1927년생으로 용인에서 시인의 생전 집필실을 재현해두고 홀로 살고 있다. 이라는 책 제목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두 사람은 부부라기보다는 문학 동지이자 연인으로 살았다. 둘은 보통의 부부관계 이상의 공통된 이상을 갖고 있었다. 시인이 괴팍한 성격을 갖고 있지만 여사도 여느 여자와는 다르다. 시인이 '아방가드르'한 여자라고 불렀다는데, 여사도 시인 못지않게 파격적인 면모를 보인다. 여사는 시인을 진명여고 2학년 때 만났다고 한다. 연애 ..

읽고본느낌 2018.10.23

죄와 벌 / 김수영

남에게 희생을 당할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사십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 죄와 벌 / 김수영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김수영 시인밖에 없는 것 같다. 자신의 치부를 이 정도로 적나라하게 까발려도 되는지 고개가 저어진다. 우산으로 여편네를 패고는 우산 두고 온 게 아깝다고 말한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인간쓰레기라고 부를 만하다. '성(性)'이라는 시는 더 노골적이다. 이런 시가 발표되면 부인의 심정은 어떨까. 당시 ..

시읽는기쁨 2018.10.21

기도 / 김수영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소박하게 성취한 우리들의 혁명을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살쾡이에게 진드기에게 악어에게 표범에게 승냥이에게 늑대에게 고슴도치에게 여우에게 수리에게 빈대에게 다치지 않고 깎이지 않고 물리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그러나 정글보다도 더 험하고 소용돌이보다도 더 어지럽고 해저보다도 더 깊게 아직까지도 부패와 부정과 살인자와 강도가 남아 있는 사회 이 심연이나 사막이나 산악보다도 더 어려운 사회를 넘어서 이번에는 우리가 배암이 되고 쐐기가 되더라도 이번에..

시읽는기쁨 2016.12.21

논어[202]

계강자가 정치에 대하여 선생님께 물었다. "만일 억지꾸러기들을 죽여서 바른 길로 나오도록 하면 어떨까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정치를 하면서 왜 죽이자는 거요? 당신이 잘 하면 백성도 잘 할 것을! 윗사람의 인품은 바람이요, 아랫사람의 인품은 풀잎이니, 풀 위에 바람이 스치면 쓸리고야 말걸." 季康子 問政於孔子 曰 如殺無道 以就有道 何如 孔子對曰 子爲政 焉用殺 子欲善 而民善矣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 顔淵 14 공자의 정치는 덕치(德治)다. 먼저 지도자가 군자가 되어야 한다. "당신이 잘 하면 백성도 잘 하게 된다!" 이런 말을 하는 공자의 머릿속에는 요순시대의 이상사회가 그려졌을지 모른다. 계강자가 공자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은 불문가지다. 불가능한 줄 알면서 공자는 말한다. 그..

삶의나침반 2016.07.05

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 봄밤 / 김수영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고래(古來)의 명언이다. 인간 사는 ..

시읽는기쁨 2015.03.01

김수영 산문집

김수영 시인의 정의에 따르면 '지식인'이란 '인류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처럼 생각하고, 인류의 고민을 자기의 고민처럼 고민하는 사람'이다. 지식을 자신의 이(利)를 탐하는 데 쓰는 사람은 사이비 지식인이요 지식 장사꾼일 따름이다. 우리 시대에 지식인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쓴 시보다 산문을 읽는 게 훨씬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김수영의 산문을 통해 김수영 정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냉철한 현실감각과 날카로운 비판 의식, 자기 성찰, 속물에 대한 경계, 반짝이는 천재성, 유머, 맑은 양심 등, 이번에 시인의 산문을 읽으며 이런 느낌이 들었다. 민음사에서 나온 중 두 번째 권이 산문집이다. 수필과 시론, 평론 등이 실려 있다. 그중에서 1부에 수록된 수..

읽고본느낌 2013.05.22

性 / 김수영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憐憫의 순간이다 恍惚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憐憫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 性 / 김수영 김수영 시인도 이런 시를 썼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

시읽는기쁨 2009.07.05

눈 / 김수영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눈 / 김수영 예전부터 이 시에 나타난 눈의 이미지를 어떻게 읽을지 망설여졌다. 하얀 눈은 순수와 순결의 상징이지만 여기서는 꼭 그렇지만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좀 삐딱한 독해을 하고 싶다. 눈은 세상의 사물을 한 가지 색으로 덮어 버린다. 눈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풍경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세상의 진실은 아니다. 그래서 눈을 '순수로 위장된 거짓'..

시읽는기쁨 2009.06.30

거대한 뿌리 / 김수영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南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以北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八一五 후에 김병욱이란 詩人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四年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强者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女史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英國王立地學協會 會員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世界로 화하는 劇的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無斷通行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外國人의 종놈, 官吏들뿐이었다..

시읽는기쁨 2008.07.03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

시읽는기쁨 2007.11.26

강가에서 / 김수영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 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했다 초저녁에 두번 새벽에 한번 그러니 아직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

시읽는기쁨 2006.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