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4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 문태준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몰랐지 늦가을을 제일로 숨겨놓은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살아도 살아갈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과일을 다 가져가고 비로소 그 다음 잎사귀 지는 것의 끝을 혼자서 다 바라보는 저곳이 영리가 사는 곳 살아도 못 살아본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못 살았지 -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 문태준 수확이 끝난 빈 들판의 빈 원두막은 모든 것 다 내어주고 참 편안하다. 비어있음의 충만이다. 욕심도 버리고 원망도 내려놓고, 아무도 없는빈자리에는 바람이 지나고 하늘이 깃들게 하리. 그러나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못 사는 사람 많다. 단풍 속으로 들어간다고 모두가 가을을 사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 시에 나오는 '영리'란 무슨 뜻일까? 사람 이름일까? 사전에서 ..

시읽는기쁨 2008.11.11

가재미 /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시읽는기쁨 2008.10.01

찰나 속으로 들어가다 / 문태준

벌 하나가 웽 날아가자 앙다물었던 밤송이의 몸이 툭 터지고 물살 하나가 스치자 물속 물고기의 몸이 확 휘고 바늘만 한 햇살이 말을 걸자 꽃망울이 파안대소하고 산까치의 뾰족한 입이 닿자 붉은 감이 툭 떨어진다 나는 이 모든 찰나에게 비석을 세워준다 - 찰나 속으로 들어가다 / 문태준 문태준의 시에서는 선(禪)의 향기가 난다. 나는 '신비'라는 말이 좋다. 찰나적으로 생멸하는 현상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인과로 얽힌 거대한 네트워크를 상상하면 현기증이 인다. 그것은 인간의 지각 능력 이상의 그 무엇으로 4차원 시공간의 틀을 초월하는 신비의 세계다. 우리가 아는 것이란 실은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 때의 '순식(瞬息)'은 10의 17제곱분의 1이라는 아주 작은 수다. '찰나(..

시읽는기쁨 2007.09.28

비가 오려 할 때 / 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 비가 오려 할 때 / 문태준 그녀가 뒤돌아 앉아 소리 없이 운다. 가끔씩 휴지통의 휴지만 조심스레 뽑혀나갈 뿐이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무척 서러운가 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녀의 눈물이 비를 부른다. 그래서 비 오기 전의 수런거림으로 마음은 바빠진다. 산다는 건 이렇듯 어쩔 수 없이 수런거리는 것이다. 그녀가 소리도 없이 울고, 나는 뒤에서 아프게 지켜 보고, 어느새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만들고 ..

시읽는기쁨 2007.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