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 12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작은 섬에 들어가 사시는 분을 화면에서 봤다. 이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덕목을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로 표현했다. 교수로 살면서 덧씌워진 명성과 과대포장된 삶을 벗고 본연의 나를 찾고픈 바람이 간절해 보였다. 하지만 속 마음이야 어떻든 섬에서 살아가는 삶은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보이지 않았다. 교수인 삶을 살았던 조건(정신적, 경제적)을 떨쳐버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명성을 버린다 하면서 명성을 이용한다. 소유의 맛을 즐기면서 겉으로는 무소유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다. 숨겨진 민낯이 드러나 비난을 받는 유명인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차라리 무소유를 명분으로 내세우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이상적/대안적 삶이 가진 자에 의해서 소비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무소유라든가 '..

참살이의꿈 2023.08.10

몰라서 못 먹는다

집에는 냉장고가 세 대 있다. 두 노인이 사는 집 치고 과하지만 전에 자식들과 같이 살 때 쓰던 냉장고가 고장 없이 작동하고 있으니 계속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아내에게 한 대를 없애자고 제안했지만 다 쓸모가 있다고 한다. 부엌 살림살이는 아내 소관이니 어찌할 수가 없다. 세 대의 냉장고는 어디를 열어봐도 빈틈없이 뭔가가 가득 들어 있다. 둘이 사는 살림에 무슨 먹을거리가 이토록 필요한지 모르겠다. 아내조차도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을 파악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뭘 찾자면 이 냉장고 저 냉장고로 왔다갔다 한다. 냉장고만 아니라 옷장도 마찬가지다. 십 분의 일로 줄여도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것 같다. 냉장고 문을 열면서 아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부쩍 늘어난 말이다. "이런 게 있..

참살이의꿈 2023.05.25

필요한 하나

조선 중종 때 문신인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의 호는 팔여거사(八餘居士)다.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기묘사화에 휩쓸려 삭탈관직 되자 고양 명봉산 자락에 들어가 은거하며 사신 분이다. 그가 말한 '팔여(八餘)', 즉 '여덟 가지 넉넉한 것'은 이렇다. 1. 토란국과 보리밥을 넉넉히 먹고 2. 등 따뜻하게 넉넉히 잠자고 3. 맑은 샘물을 넉넉히 마시고 4.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히 읽고 5. 봄꽃과 가을 달빛을 넉넉히 감상하고 6. 새와 솔바람 소리를 넉넉히 듣고 7.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 향기를 넉넉히 맡는다. 8. 그리고 이 일곱 가지를 넉넉히 즐기니, 이것이 팔여(八餘)다. 팔여거사의 넉넉함은 자족(自足)에서 나온다. 사람은 욕심을 부리면 끝이 없지만, 분수를 알고 만족하면..

참살이의꿈 2020.12.14

산에 대하여 / 신경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

시읽는기쁨 2020.11.27

서늘함 / 신달자

주소 하나 다는 데 큰 벽이 필요 없다 지팡이 하나 세우는 데 큰 뜰이 필요 없다 마음 하나 세우는 데야 큰 방이 왜 필요한가 언 밥 한 그릇 녹이는 사이 쌀 한 톨만 한 하루가 지나간다 - 서늘함 / 신달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나이 먹는 것과 사람다움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관성대로 살다가는 삶이 누추해질 뿐이다. 젊어서는 패기였어도 늙어서는 주책이 된다.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 덜어내고 덜어낼 일이다. 서늘해질 일이다.

시읽는기쁨 2019.06.17

프리터

프리터(Freeter)란 프리(Free)와 아르바이터(Arbeiter)의 합성어로, 정규직 대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해결하며 자유롭게 사는 사람을 말한다. 어쩔 수 없이 프리터가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진정한 프리터는 정규직을 자의로 포기하고 최소한의 일을 하는 선택하는 사람이다. 한 달에 100만 원 정도의 수입으로 살아갈 자신이 있어야 한다. 시간당 1만 원으로 계산해서, 하루에 5시간씩 20일 일하면 1백만 원이 나온다. 이런 프리터가 일본에서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얼마 전 신문에 충북 청주에 사는 프리터 한 분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그는 커피 전문점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로 버는 50만 원으로 한 달을 산다. 월세와 관리비로 22만 원, 휴대폰비와 교통비로 10만 원, 나머지는 식비..

참살이의꿈 2019.02.24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안성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장석주 작가의 행복론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 소박한 삶을 살자는 흐름은 오래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화려한 소비 중심의 현대 문명에 대한 반감이자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려는 자연스러운 운동이다. 작고 단순함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문명이 주는 안락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며 불편하더라고 적게 소비하고 단순하게 살아가는 데서 행복을 찾는다. "소박하게 먹고 단순하게 사는 것, 그게 내 방식의 삶이다. 하루의 보람은 사과 한 알 먹는 거, 세 시간 이상 햇볕을 쬐며 걷는 거, 8시간 정도 읽고 쓰는 거, 심심함 속에 머무는 거 따위다. 그리고 이타적 생각을 하며 살기,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 되기를 실천해야 삶이 온전해진다." 작가는 시골에 살며 그런 삶을 실천한..

읽고본느낌 2018.05.16

한계효용체감의 법칙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이 이름 외우느라고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안 그래도 정치경제 과목이 싫었는데 법칙의 명칭조차 어렵기만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계효용'이니 '체감'이니 굳이 이런 한자 용어를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좀 쉽게 부르는 말이 없을까?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뜻하는 바는 단순하다. 단위 재화를 소비할 때 얻는 만족이 점점 감소하게 된다는 원리다. 예를 들면, 갈증이 나서 물 한 잔을 마시면 만족도가 높다. 그러나 두 잔을 마신다면 두 번째 잔은 첫 번째만큼의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세 번째는 그냥 밍밍한 맛일 수 있다. 잔이라는 단위가 주는 만족도는 감소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은 인생사에도 적용할 수 있다. 오랜만에 외국에 나가는 사람은 비행기를 타는 것만도 가..

참살이의꿈 2018.02.12

작은 집을 권하다

나에게 남은 바람이 있다면 조용한 터에 자그마한 집 하나 갖고 싶은 것이다. 번잡한 일상으로부터 피신처 역할을 하는 곳이다. 마음이 답답한 때는 그곳에 찾아가 며칠 푹 쉬었다 오고 싶다. 책을 한 보따리 들고 가서 오직 글자 속에 묻혀 지내고도 싶다. 다카무라 토모야 씨가 쓴 는 아주 작은 집에서 살아가는 여섯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 생각 같은 세컨드 하우스 개념이 아니라 실제 거주하는 집이다. 집 크기는 대체로 세 평 안팎이다. 극단적으로 작은 집이다. 작은 집은 작고 소박한 라이프 스티일을 지향한다. 세 평 짜리 집에 산다는 건 종교적인 신념에 가까운 의지가 없다면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스몰 하우스 운동'에 뛰어든 이들은 대부분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다. ..

읽고본느낌 2016.11.10

감자를 깎는다 / 이오덕

3시에 일어나 불을 켜고 어제 못다 본 신문을 읽는데 석 줄도 안 나가서 꾸벅꾸벅 그렇다고 누우면 잠은 달아난다. 서너 줄 읽다가 눈 감고 잠깐 쉬고 다시 읽다가 꾸벅꾸벅..... 그렇다, 감자를 깎자. 이럴 때 나는 감자를 깎는다. 감자는 모조리 밤알만큼 한 것들 그것도 겨울 난 감자라 싹이 나고 시들시들 골아 버린 것을 무주 산꼭대기에 사는 강 선생이 갖다 준 댕댕이바구니에 담아 와서 왼손잽이 등산칼로 깎는다. 이 조무래기 감자는 그대로 찌면 아려서 먹기가 거북해 그래서 깎는 것이고, 깎는 재미로 깎는 맛으로 깎는 것이다. 왼손잽이 내 손은 야구나 정구를 하면 놀림바탕이 되었지만 감자 깎고 밭 매고 풀 베는 데는 아무도 흉보는 사람이 없었지. 감자를 깎으면 생각나는 것이 또 많다. 무엇보다도 아주 어..

시읽는기쁨 2013.07.19

평온한 삶 / 포프

물려받은 몇 마지기 땅 외엔 더 바랄 것도 더 원할 것이 없고 제 땅에 서서 고향 공기를 들이마시며 흡족한 자는 행복한 사람 소 길러 우유 짜고 밭 갈아 빵을 얻고 양떼 길러 옷 만들고 나무에서 여름철엔 그늘을 겨울철엔 땔감을 얻네 날마다 조용히 근심걱정 모르고 매순간, 매일, 매년을 스쳐보내는 건강한 육신, 평온한 마음을 가진 자는 복 받은 사람 밤에는 편히 자고, 배우다 때로 쉬니 더불어, 상쾌한 여유로움 그 순박함은 고요한 명상과 더불어 더욱 흐뭇해지네 나 또한 이처럼 흔적 없이 이름 없이 살다 미련 남기지 않고 죽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구나 내 누운 곳 말해줄 비석조차 하나 없이 - 평온한 삶 / 알렉산더 포프 Happy the man whose wish and care A few paternal..

시읽는기쁨 2011.07.09

청빈(淸貧)

내가 존경하는 사람중에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평화주의자, 사회주의자, 채식주의자라고 불렀는데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에 따라 아름다운 일생을 산 용기있는 사람이다. 어찌보면 미국 사회의 아웃사이더라고 할 수 있는데 현대 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몸으로 실천하며 보여준 분이다. 니어링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 제국주의라는 정치 체제를 혐오했는데 이것에 대한 저항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이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따라 일관되게 행동한 분이다. 그것은 결국 부의 포기와 단순 소박한 생활로 나타나게 된다. 그 분이 부를 보는 관점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부는 타락했다..

참살이의꿈 2004.02.22